비건 전쟁의 서막
단식 투쟁부터 식용 탄환(감자 등으로 만든 총알)에 이르기까지 역사 속에는 음식이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된 수많은 예가 있다. 그럼에도 올해 초 런던 중심가에 모인 비건[1]들은 게티스 라그즈딘스(Gatis Lagzdins)가 다람쥐의 가죽을 벗기고 뜯어 먹은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라그즈딘스는 공동 기획자인 데오니시 클렙니코프(Deonisy Klebnikov)와 함께 매주 루퍼트 가에서 열리는 소호 비건 마켓(Soho Vegan Market)에서 위와 같은 일을 벌이며 이목을 끌었다. 그는 이후 브라이튼의 베그페스트(VegFest)에서 식물성 식단의 폐해를 꼬집는다는 명목하에 자칭 ‘육식 투어(carnivore tour)’의 일환으로 비슷한 퍼포먼스를 했다(이번에는 생돼지머리였다). 런던에서 개최된 행사에서는 ‘비거니즘=영양실조’라는 슬로건이 새겨진 검은 조끼를 입기도 했다.
비건에 맞서는 전쟁의 시작은 작았다. 그러나 일촉즉발의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고 일부는 언론에 보도될 만큼 격화되기도 한다. 잡지 《웨이트로즈(Waitrose)》 편집장이었던 윌리엄 시트웰(William Sitwell)은 “비건 한 명씩 죽이기”에 대한 농담조의 메시지를 교환한 이메일이 프리랜서 기자를 통해 유출되면서 사임했다(이후 시트웰은 사과했다). 냇웨스트(Natwest) 은행은 기업 이미지 관리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자사 직원이 대출을 신청하는 고객에게 이런 말을 했기 때문이다. “모든 비건은 주먹으로 얼굴을 맞아야 한다.” 지난해 9월 동물 권리 보호를 요구하는 시위대가 브라이튼의 피자 체인점 피자 익스프레스에 난입했을 때, 한 손님이 했던 바로 그 행동 말이다.
비건들은 일반적으로 피해자의 입장을 즐긴다는 이유로 비난받지만, 한 연구는 그들이 실제로 피해자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2015년에 카라 맥기니스(Cara C. MacInnis)와 고든 허드슨(Gordon Hodson)이 학술지 《그룹 프로세스 앤드 인터그룹 릴레이션스(Group Processes & Intergroup Relations)》에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서구 사회의 채식주의자와 비건(특히 비건)은 다른 소수자들과 비슷한 수준의 차별과 편견을 경험한다고 한다.
〈심슨 가족(The Simpsons)〉과 같은 TV쇼에서 소수 이익 단체를 패러디의 소재로 삼으면서 비건은 지난 2년 동안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심슨의 한 캐릭터가 그림자가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먹지 않는다며 스스로를 ‘5등급 비건’이라고 소개했다). 불가침에 뿌리를 둔 철학은 소셜 미디어에서 가장 격렬한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영국의 아침 뉴스 프로그램 〈굿모닝 브리튼(Good Morning Britain)〉은 2018년 11월에 “사람들은 비건을 싫어할까?”라는 제목의 토론을 주최했다. 일주일 후에 정치 뉴스 웹사이트 《복스(Vox)》는 문제에 더 직접적으로 접근하는 질문을 던졌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비건을 싫어할까?”
비건에 대한 증오가 드러나는 최근의 사건들은 당황스러울 만큼 커지는 적대감을 보여 주고 있다. 동시에 고기를 적게 먹는 것이 모두와 지구를 위하는 길이라는 공감대도 형성되고 있다. 물론 고기를 적게 먹는 것이 고기를 전혀 먹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비거니즘과 관련된 극단적인 금지 사항(동물성 식품, 달걀의 섭취, 가죽, 양털 등의 사용)은 또 다른 앳킨스 식단(Atkins diet, 저탄수화물 식단)이나 클린 이팅(Clean eating, 자연 상태에 가까운 식사 습관)처럼 가벼운 반성만 남기는 일시적인 유행일 수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한계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됐던 비건의 확산세는 지속되었다. 2016년 입소스 모리(Ipsos Mori)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영국에서 비건은 지난 10년간 360퍼센트 이상 증가하면서 50만 명을 넘어섰다.
대기업은 빠르게 투자에 나섰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본사를 둔 비욘드 미트(Beyond Meat)는 맛과 질감이 다진 소고기와 흡사한 식물성 햄버거를 생산하는 업체로 2019년 5월 상장하자마자 34억 달러(4조 원)의 가치 평가를 받았다. 네슬레와 켈로그 같은 거대 식품 기업들은 대체육 시장에 진출하고 있고, 슈퍼마켓과 식당 체인점들도 다양한 비건 제품을 소개해 왔다. 그러나 비거니즘이 주류가 되었다는 결정적인 증거와 그에 따른 반발을 확인할 수 있었던 계기는 지난해 1월 시내 중심가의 유명 빵집 체인점 그렉스(Greggs)가 퀀(Quorn, 버섯으로 만든 고기 대용 식재료)으로 만든 비건 소시지 롤을 출시한다고 발표했을 때다. 영국 언론인 피어스 모건(Piers Morgan)은 트위터에 “PC(Political Correctness)에 유린당한 광대들아, 아무도 빌어먹을 비건 소시지를 원하지 않았어”라는 글을 올렸다. 그러나 모건의 판단은 틀렸다. 비건 소시지 롤은 히트했고 회사 주가는 13퍼센트나 올랐다.
물론 기르고 수확하고 살찌워서 죽이는 것은 정치적인 문제다. 비건 상품을 선보인 테스코(Tesco)의 광고는 고기를 ‘악마화(demonised)’했다고 주장하는 전국 농민 조합(National Farmers Union)의 반발을 샀다. 슈롭셔(Shropshire, 영국 중부의 양고기 생산 지역) 주의회의 스티브 차믈리(Steve Charmley) 부의장은 “농업을 기반으로 한” 지역에서 채식을 권장하는 광고를 하는 것을 비판했다가 ‘폭풍 트윗’을 받았다. 지금 이 갈등이 일어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비거니즘의 확산은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라기보다는 세대의 대변동에 관한 문제다. 고기, 생선 혹은 유제품 자체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과도한 양을 식탁 위에 올려놓는 시스템의 문제다. 궁극적으로 비건 전쟁은 사실 비거니즘에 관한 것이 아니다. 개인의 자유가 건강, 환경의 위기와 어떻게 충돌하고 있느냐에 관한 것이다.
접시를 두고 벌이는 전투
많은 문화권에서 동물 생산물 섭취를 완전히 삼가는 관습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많은 라스타파리교(Rastafari)와 자이나교(Jainism)의 추종자들, 불교의 특정 종파들은 비폭력에 뿌리를 둔 신념 체계를 바탕으로 수 세기 동안 고기, 생선, 달걀, 유제품을 끊겠다고 맹세해 왔다. 그에 반해 서구에서는 비거니즘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피상적이었다. 1944년 도널드 왓슨(Donald Watson)이라는 영국 목공예사가 그들의 생활 방식을 정의할 복잡하지 않은 명칭을 정하기 위해 그의 아내 도로시(Dorothy)를 포함해서 유제품을 먹지 않는 소수의 채식주의자 회의를 소집하기 전까지는 비거니즘을 일컬을 적합한 명칭조차 없었다. 그들은 데어리밴(dairyban), 비탄(vitan), 베네보르(benevore)와 같은 대안을 고려하다가 ‘채식주의에서 시작해 논리의 정점에 이른 결과’라는 의미를 축약한 비거니즘으로 결정한다.
이러한 논리적인 결론은 특정 음식을 금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원래 비거니즘은 지금처럼 동물성 단백질을 거부하는 것을 넘어 동물이 산업 공급망의 일부가 되는 것에 반대하는 하나의 신념 체계나 이념이 아니었다. 1970년대에 캐롤 애덤스(Carol J. Adams)는 20년 후에 출판될 《육식의 성 정치(The Sexual Politics of Meat)》라는 책을 집필하면서 여성과 동물을 욕망의 대상이면서 쓰고 버려도 되는 것으로 만든 사회적 시스템을 해결할 유일한 논리 체계로 비거니즘을 제시한다.
70년대 초, 다른 활동가들은 비거니즘이 어떻게 기존의 식품 시스템에 실행 가능한 대안을 제공할 수 있는지 따져 봤다. 1971년에 사회 정책 운동가인 프란시스 무어 라페(Frances Moore Lappé)는 저서 《작은 행성을 위한 식사(Diet for a Small Planet)》를 통해 전 세계 독자에게 채식주의자나 비건이 되어야 할 환경적 정당성을 제공했다(이 책은 300만 부 이상 팔렸다). 같은 해에 반문화의 영웅 스티븐 개스킨(Stephen Gaskin)은 테네시주 루이스 카운티에 국제 채식주의자 단체인 더 팜(The Farm)을 설립해 300여 명의 뜻이 맞는 사람들을 모았다. 4년 뒤 루이스 헤글러(Louise Hagler)는 《농장의 채식주의 요리책(The Farm Vegetarian Cookbook)》을 통해 “우리는 모두 채식주의자다.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굶주리고 있고 절반은 매일 밤 배고픈 채로 잠자리에 든다”고 주장하며 서구 독자들에게 두부와 템페(tempeh, 콩을 거미줄 곰팡이 균으로 발효시켜 만든 인도네시아 음식)로 요리하는 법을 소개한다.
《농장의 채식주의 요리책》은 수십 년 동안 육류를 주식으로 삼은 문화에 특정한 이미지의 비건 미학을 주입시켰다. 비거니즘은 지금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인스타그램 피드에 긍정적인 기운을 발산하는 화려하고 활기찬 젊은 실천가들의 것이 아니었다. 콩과 현미의 동의어로 쓰이거나 베이지색의 곡물과 두류(豆類)가 가득 담긴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떠먹는 나이 든 히피들을 상징했다.
즉각적인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는 소셜 미디어는 비거니즘의 이미지를 변화시키는 데 상상 이상의 역할을 했다. 블로그 ‘샐러드와 함께 웃고 있는 여자(Woman Laughing Alone with Salad)’[2], 아사이 볼(acai bowls), 그리고 이 세대를 대표하는 아보카도 토스트만 봐도 인터넷의 영향력이 오래되고 진부한 비거니즘을 변화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인스타그램은 인터넷 세대에게 비건 음식을 건강에 이롭고 포토제닉한 것으로 재포장하는 데 성공하며 비거니즘을 주류 문화에 노출시켰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이 변화를 긍정적으로 보지는 않는다. 비건 작가이자 팟캐스트 진행자인 앨리샤 케네디(Alicia Kennedy)는 인터넷이 오히려 풍부한 정치적 역사를 가진 비거니즘을 “웰빙과 관련된 것”으로 만들어 소비자들이 “필요 이상의 부담”을 지지 않고도 스스로를 비건이라고 지칭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걱정한다. 또 다른 미국 작가 쿠시부 샤(Khushbu Shah)는 소셜 미디어로 비거니즘이 대중화되고 백인 블로거와 인플루언서를 중심으로 비건 생활 방식이 자리 잡으면서 다른 인종의 이야기가 비거니즘 담론에서 사라졌다고 주장했다.
비건의 식단에도 비슷한 변화가 일어났다. 주요 도시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길거리 음식은 더 지저분하고 더 군것질에 가까운 비건 미학을 형성하며 대중의 관심을 끌어올렸다. 화려한 남성 듀오가 운영하는 유튜브와 페이스북의 레시피 채널인 보시(BOSH!)는 식단에 재미를 불어넣는 스턴트 요리, 즉 애플파이 타코, 채식으로 해석한 맥도날드 맥머핀, 수박으로 만든 예거밤(독일 술인 예거마이스터와 에너지 드링크를 혼합해 만드는 칵테일) 등을 만드는 비디오를 제작한다. 보시의 헨리 퍼스(Henry Firth)와 이언 테아스비(Ian Theasby)는 스스로를 요리사가 아니라 “음식 리믹서”라고 부른다.
언어도 비거니즘을 더 새롭고, 접근하기 쉬운 방식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식물성’과 같은 용어는 갈색의 탄수화물로 가득 찬 음식을 파릇파릇하고 생명력 있는 음식으로 리브랜딩하는 데 성공했다. ‘플렉시테리언(flexitarian, 주로 비건 또는 채식주의자지만 가끔 고기나 생선을 먹는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로 2014년 6월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실렸다)’과 같은 신조어는 받아들이기 버거운 비건 이념을 재미있고 건강하고 일상적인 것으로 제시한다.
채식하는 1월(Veganuary, Vegan과 January의 합성어로, 한 해의 첫 달 동안 고기 없이 생활할 것을 장려하는 연례 캠페인. 2014년 시작됐다)이나 ‘고기 없는 월요일(Meat Free Mondays, 비틀스의 멤버 폴 매카트니의 제안으로 시작된 것으로 매주 월요일에는 고기를 먹지 말자는 운동)’과 같은 컬트적 행동들도 비슷한 맥락이다. 식습관을 단번에 바꾸는 것이 아니라 온라인상에 경험을 공유하면서 (혹은, 자랑하면서)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실천을 하는 것이다. 비욘세는 아침 식사를 비건으로 먹겠다고 선언하고, 비너스 윌리엄스(Venus Williams, 건강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생채식주의 식단을 고집한다)나 루이스 해밀턴(Lewis Hamilton) 같은 운동선수들은 한때 이상하고 성가시게 보였던 비거니즘을 바람직한 생활 방식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현대 서양식 식단의 생산 과정이 우리의 건강을 해친다는 과학적 문헌이 증가한 것도 비거니즘을 추구하는 명분으로 작용했다. 비 윌슨은 〈베이컨이 우리를 죽이고 있다〉에서 가공육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썼다. 글로벌 비영리 단체인 잇(Eat, 글로벌 식품 시스템을 혁신하려 하는 스타트업)과 의학 학술지 《란셋(Lancet)》이 의뢰한 보고서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3] 시대의 식품〉은 질병의 가장 큰 원인으로 ‘건강하지 못한 식단’을 꼽으며 ‘육류의 과도한 생산이 환경을 악화시킨다’고 결론지었다. 2018년 10월 과학 학술지 《네이처(Nature)》에는 기후 변화를 늦추기 위해서는 육식을 상당히 많이 줄이는 것이 필수라는 옥스퍼드 대학 연구팀의 연구 결과가 실렸다. 가축 생산은 삼림을 파괴하고 온실 가스를 위험한 수준으로 배출한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카우스피러시〉와 〈왓 더 헬스〉 등에 나타나는 대중 과학 현상을 보면 식단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갑자기 세상을 구할 수 있을 것 같다.
육류 업체들은 육류를 먹을 권리를 지키기 위해 공격적인 로비를 지속하고 있다. 그 결과 ‘고기’라고 불릴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심지어는 (미국의 한 주에서는) ‘채식 햄버거’라고 불릴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둘러싼 일련의 법적 규정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비거니즘의 확산세는 막을 수 없다. 대략 2015년부터 비건 혹은 채식주의 요리책이 엄청난 속도로 늘었고 유튜브 채널 ‘보시’의 제작자들이 펴낸 책은 8만 부 이상 판매되면서 《선데이 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4주 동안 머물렀다(지금 아마존에서 ‘비건 요리책’을 검색하면 2만 개가 넘는 검색 결과가 나온다). 식물성 우유의 판매량이 급증하고 식물성 단백질 퀀을 생산하는 업체의 재무 성과 지표가 치솟으면서 한 분석가는 “접시를 두고 벌이는 전투”가 (가짜) 피를 불러오고 있다고 했다. 2018년까지 (영국의 패스트푸드점) 바이런(Byron), M&S, 프레타망제는 비건 제품군에 막대한 투자를 했다. 한 기사가 표현한 것처럼 “그해는 비거니즘이 반문화의 영역에서 주류로 옮겨간 해”였다. 2014년 채식하는 1월의 첫 번째 캠페인에는 3300명의 참가자가 모였다. 2019년에는 그 숫자가 25만 명을 넘었고, 53퍼센트는 35세 미만이었다.
그러나 비거니즘의 폭발적인 성장이 비거니즘을 둘러싼 논란이 일어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채식주의자나 비건에게는 설명하기 힘든 내면 깊은 곳의 감정을 건드리는 무언가가 있다. 채식이나 비건을 택하지 않은 사람들의 반발심을 건드리는 비건의 생활 방식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왜 그렇게 비건을 싫어할까?
육식을 지켜라
비건 유토피아를 설립하려는 초기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1840년대의 초월주의 철학자 아모스 브론슨 올콧(Amos Bronson Alcott, 작은 아씨들의 작가 루이자 메이의 아버지)은 제2의 에덴을 만들고자 매사추세츠주 하버드에 비건 공동체인 프루트랜드(Fruitlands)를 설립했다. 그러나 작물을 직접 심고 밭을 직접 갈아야 한다는 올콧의 말은 모든 구성원을 먹일 식량을 재배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멤버 수가 가장 많았던 때가 13명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대개 날것의 과일과 곡물로 이루어진 식단은 참가자들에게 심각한 영양실조만을 남겼다. 개원 7개월 만에 프루트랜드는 문을 닫았고 한 전기 작가는 “역사상 가장 성공하지 못한 유토피아 중 하나”라고 조롱했다.
여론전에 불이 붙은 타이밍은 미국 채식주의자들에게는 유감스러웠다. 19세기에 채식주의자와 비건은 ‘죽은 사람 같은’, ‘허약한’, ‘몹시 화난’, ‘퍼렇게 상한 얼굴’, ‘음식 괴짜들’을 의미하는 용어인 그레이엄족(Grahamites)으로 불리며 당시 대중과 의학계, 언론의 독설에 찬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레이엄족은 육식이 건강에 해롭고 도덕적으로도 혐오스럽다는 이유로 육식을 반대하는 운동을 펼친 장로교 목사이자 식단 개혁가인 실베스터 그레이엄(Sylvester Graham)의 이름에서 파생된 용어다.
21세기 들어 사용되는 용어는 바뀌었을지 모르지만, 그 정서는 변하지 않았다. 2015년에 맥기니스와 허드슨이 실시한 연구에서 응답자들에게 채식주의자보다 더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대상은 마약 중독자뿐이었다. 이 보고서는 “인종 차별이나 성차별과 같은 다른 형태의 편견과는 달리 채식주의자와 비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사회 문제로 간주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아주 흔한 일이며 대체로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2011년 사회학자 매튜 콜(Matthew Cole)과 캐런 모건(Karen Morgan)은 ‘베가포비아(vegaphobia)’라고 불리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영국 언론이 비건을 꾸준히 부정적으로 묘사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윌리엄 시트웰의 비건 비하 이메일을 받은) 잡지 《웨이트로즈》의 프리랜서 기자 셀레네 넬슨(Selene Nelson)의 폭로가 퍼졌을 때 그녀는 며칠 동안 ‘멋없는’, ‘전투적인’, ‘공격적인’ 사람으로 불렸다. 2017년 스위스 아르가우(Aargau)의 주민들은 ‘성가시다’는 이유로 한 비건 외국인 거주자의 시민권을 박탈하라고 요구했고, 이 이야기가 고소하다는 반응과 함께 세계 언론에 재조명된 방식은 널리 퍼져 있는 무심한 편견을 드러냈다.
비거니즘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적개심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수의 반대 의견을 서술한다. 이제는 익숙해진 농담(질문: 어떤 사람이 비건인지 어떻게 알아? 대답: 걱정하지 마, 그들이 네게 먼저 말해 줄 거야)에 따르면 비건은 설교하려 들고 독실한 척하는 사람으로 인식되는데, 이는 “채식주의자/비건의 동기가 개인의 건강보다는 사회 정의와 관련돼 있을 때” 더 부정적으로 보인다. 이는 맥기니스와 허드슨의 연구에 참여한 응답자들이 공감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건강상의 이유와 같은 합리적인 동기로 비건 식단을 반대하기도 한다. 비건 식단을 유지하면 비타민 B-12와 같은 중요한 영양소가 부족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일부 비건 블로거나 영양학을 비정통적으로 접근하는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들이 옹호하는 극단적인 식단(프루테리어니즘, fruitarianism, 과일만 먹는 식단)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다양한 슈퍼마켓 체인점들은 임파서블 버거(Impossible Burger)부터 식물성 미트볼, 구종즈(goujons, 작은 생선 튀김), 핫도그에 이르기까지 비건 즉석 식품에 대한 급증하는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다. 비 윌슨의 주장처럼 비건 제품에 첨가된 높은 비율의 가공된 재료는 소위 채식의 건강 후광 효과가 환상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비거니즘이 주류가 되고, 비욘드미트와 같은 기업들이 일확천금을 벌어들이는 것을 보면 이런 움직임이 하나의 산업화된 시스템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의 건강이나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했을 때, 집중적인 가축 농업은 세계 기아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증거가 많이 나왔다. 그러나 콩, 옥수수, 곡물을 집약적으로 공업화한 농업에도 상당한 탄소 비용이 든다. 아사이 볼에 넣을 베리와 견과류로 만든 버터, 토스트에 얹을 아보카도 등도 비행기로 운반하기 때문에 마찬가지다.
비거니즘은 사회 정의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주류가 되는 과정에서 세부 사항들은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21세기 들어 희석되기는 했지만, 비거니즘을 둘러싼 대립은 여전하다. 비거니즘은 사람들의 식단에 가혹하게 주목하고,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방어한다. 고기가 비싼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채식주의자나 비건이 되기도 한다. 부유한 서부에서는 사람들이 주체적으로 고기를 먹지 않는다. 이것은 일반적인 생활 방식을 거부하고 다수 국민이 가진 가치를 비난하는 것이 된다. 특히 식량 배급이라는 긴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전히 고군분투하고 있는 국가(영국 등)에서는 일반적인 생활 방식을 거부하고 다수의 국민이 공유하는 가치를 꾸짖는 일이 된다. 우리는 동물을 좋아하고 동물 학대를 비난하지만 베이컨 샌드위치, 일요일 만찬용 구이 요리, 피시 앤드 칩스를 즐기는 문화에서 자랐다. 사람들이 비건을 싫어하는 이유는 정말 단순하게도 인류가 음식을 선택할 때 얼마나 혼란스러워하는지, 그 의사 결정 과정이 얼마나 비논리적일 수 있는지 드러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구체적으로 비건의 어떤 지점이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지는 여전히 답하기 어렵다. 비건을 유머 감각이 없고, 공격적이고, 독실한 체 하고, 성가시고, 위선적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단지 사람들이 진정으로 느끼는 두려움에 대한 연막일 뿐이다. 비건은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기괴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살고, 우리처럼 말하고, 우리처럼 행동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지점에서 다르다. 육식은 살해일지 모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고기가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고기를 먹을 자격
서양인들이 먹는 고기의 양이 적절하다는 증거는 없다. 과거에는 동물을 인도적으로 사육하고 도살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하나의 경계를 형성했고 고기를 가질 수 없는 사치품으로 만들었다. 고기는 항상 부유한 사람들의 유산이었고 번영의 상징이었다. 일반적인 복지나 번영을 암시하는 ‘모든 냄비에 닭 한 마리씩’이라는 표현은 프랑스의 헨리 4세 시대 때 처음 나와 1928년 미국의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 대통령 선거 운동 때까지 1000년에 걸쳐 모두가 원하지만 지켜질 수 없는 약속으로 남았다.
육류를 슈퍼마켓에서 쉽게 살 수 있게 된 것은 현대 농업 기술이 진보하면서부터다. 1800년대 중반부터, 농부들은 가축을 더 크고, 건강하고, 빠르게 기르고, 단시간에 도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고기가 상하는 것을 막고, 더 멀리 운반하고, 더 오래 저장할 수 있었다. 심리적 전환점은 러셀 베이커(Russell Baker)가 《뉴욕 타임스》에서 지칭한 것처럼 “소고기 광풍”을 불러일으킨 제2차 세계 대전이었다. 군인들은 통조림 고기와 함께 전선으로 보내졌다. 평화가 선포된 후에는 지글지글 익는 축하 스테이크만큼 멋진 새로운 세계를 상징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한 세기가 조금 넘는 기간 동안, 고기는 접하기 힘든 사치품에서 식단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고기를 매일 먹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해 3월, 미국 하원의원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스(Alexandria Ocasio-Cortez)는 TV 토크쇼인 쇼타임의 〈데우스 앤 메로(Desus & Mero)〉에서 그린 뉴딜(Green New Deal)에 대해 토론하며 “햄버거를 아침, 점심, 저녁으로 먹지만 않으면 되는 문제가 아닐까? 우리 좀 솔직해져 보자”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는 《란셋》에서 비슷한 시기에 고기가 환경 파괴에 미치는 영향을 상식적이고 타당한 과학을 근거로 삼아 발표한 것처럼 악의 없는 논평일 뿐이었을까? 공화당원들은 그렇지 않다고 했을 것이다.
유타주의 롭 비숍(Rob Bishop) 의원은 그린 뉴딜 정책이 통과되면 햄버거를 먹는 것은 “불법”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오카시오 코르테스의 발언을 반박했다. 이에 세바스천 고르카(Sebastian Gorka) 전 백악관 고문은 보수 정치 회의(Conservative Political Action conference)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그들은 여러분에게서 햄버거를 빼앗고 싶어 합니다! 스탈린이 꿈꿨지만 결코 이루지 못한 바로 그것입니다!”
스탈린은 실제로 미국 햄버거에 대한 감탄으로 가득 차서, 미국에 대외 무역부 장관을 보내 현지 조사를 진행한 적이 있다. 그 결과, 미코얀(Mikoyan) 커틀릿은 수십 년 동안 소련 사람들의 주식이 됐다. 그런데 “그들이 우리의 고기를 빼앗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거나 “우리들의 총을 빼앗고 있다”는 등의 구호와 비슷하다. 개인의 권리가 외부의 힘에 위협받고 타고난 권리가 공격받고 있다는 것과 비슷한 뉘앙스를 풍긴다.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 테드 크루즈(Ted Cruz)는 자신의 민주당 경쟁자인 베토 오로크(Beto O’Rourke)가 (부당하게) 상원 의원직을 차지하면 텍사스 바비큐를 금지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고 고발했다. 고기는 마치 개인의 총기처럼 바람직하지 않은 압력으로부터 얻어 낸 것, 진보주의의 공세에 저항하는 이들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남성 권리 옹호자인 조던 피터슨(Jordan Peterson)의 식단은 소고기와 소금으로만 이루어진 것으로 유명하다. 도널드 트럼프는 패스트푸드와 케첩을 곁들인 웰던 스테이크를 즐겨 먹기로 유명하다. 스스로를 ‘비트코인 육식 동물(Bitcoin carnivores)’이라고 부르는 자유주의 암호 화폐 마니아들이 구성한 소그룹도 있다.
인터넷 시대에 육류 소비는 눈에 띄게 보수적인 알파-남성성과 연결되어 있다. 게티스 라그즈딘스는 날고기를 먹는 엽기적인 행각을 벌이기 전에 인종 차별주의 이데올로기와 일루미나티(illuminatus)[4]에 기반한 우익 음모를 퍼뜨리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온라인상에서 대안 우파[5]와 연계된 집단들은 소위 ‘사회 정의의 전사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조롱하기 위해 정력 부족을 의미하는 ‘컥(cuck, 바람난 아내를 둔 남자라는 속어)’, ‘베타(beta)’와 함께 ‘소이 보이(soy boy, 여자 같은 남자를 뜻하는 속어)’라는 경멸적인 용어를 사용했다. 이런 현실은 전통적인 성 가치를 지키려는 우파 성향의 응답자들이 칠면조보다 두부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을 체제 전복적인 위험인물이라고 보고, 이들을 조롱해도 된다고 여긴다는 맥기니스와 허드슨의 연구 결과를 반영하고 있다.
음식과 관련된 욕설에는 양면성이 있다. 영국에서, ‘개몬(gammon, 돼지 뒷다리 살이나 옆구리 살을 소금에 절이거나 훈제한 것을 뜻하는 말로, 터무니없는 소리라는 뜻으로도 쓰인다)’이라는 용어는 분노한 중년 영국인들의 암갈색 피부 톤에서 영감을 받은 경멸적인 표현으로서 2010년대 초에 통용되기 시작했다. 음식은 항상 개인의 정체성에 묶여 있었고, 따라서 정치와 분리될 수 없었다. 음식과 관련된 용어의 어원을 보면 ‘식사(diet, 그리스어로는 삶의 방식)’와 ‘정권(regime, 라틴어로는 규칙)’과 같은 용어는 삶을 올바르게 이끌기 위한 투쟁을 함의한다. 해롭다고 생각되는 음식을 식단에서 강박적으로 제외하느라 고통받는 건강 유해 식품 기피증 환자의 사고방식은 ‘올바른(correct)’ 먹기에 대한 왜곡된 생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식습관이 상징하는 사람들의 결점을 언급하지 않은 채 식습관을 논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브리야사바랭(Brillat-Savarin,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미식가)의 말을 빌리자면, 당신이 누군가에게 무엇을 먹을지 말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를 말해 주는 것과 같다.
비건에 대한 대화는 훨씬 더 큰 담론을 내포하고 있다. 비거니즘을 말하는 것은 환경적, 사회적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텍사스 바비큐, 일요일 만찬용 구이 요리, 소시지 롤과 같은 전통을 말살하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음식을 선택하는 과정이 스스로와 주변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오래전부터 해온 고민도 거론해야 한다. 플렉시테리언과 같은 개념이 나오면서 비거니즘의 인기가 커진 만큼 비거니즘의 궁극적인 목표는 연간 1인당 동물 제품 소비량이 정확히 제로인 세계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과열 양상을 보이는지 알 것도 같다.
안전한 길로 돌아가라
음식은 우리의 불안을 자극하는 강력한 통로다. 반세기 전 《뉴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신(The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에 중국 음식에 흔히 쓰이는 글루탐산소다(혹은 MSG)가 두통, 발한, 심장 두근거림 등의 증상을 보이는 신규 질환과 연관되어 있다는 연구 결과가 실렸다. 향미 증진 첨가제는 악으로 취급되면서 미국의 일부 도시에서 금지되기도 했다. MSG의 부정적인 영향을 반증하는 여러 연구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식당 증후군’에 대한 편견은 여전히 널리 퍼져 있다. MSG는 이제 아시아권 이외의 요리에도 널리 사용되고 있지만, 아시아계 미국인 요리사들만 MSG 사용을 정당화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음식과 관련된 도시 괴담을 뒤집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 주는 사례다. MSG 괴담이 확산된 배경에 인종 차별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괴담을 유포한 사람들은 그들의 존재를 위협하는 새로운 사상이 인기를 얻으면서 생긴 두려움에 자극을 받은 것이다.
육식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악전고투하고 있다. 논쟁의 핵심이 스테이크가 아니라 정체성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전면적인 변화를 시도하는 움직임은 반드시 불안을 수반할 수밖에 없으며 그 불안 중 최고는 그렉스의 퀀 소시지 롤과 같은 비건 요리가 대안이 아니라 대체재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종교와 같은 몇 가지 분명한 예외 상황을 제외하고 육류는 전 세계 문화에서 최고의 지위를 유지했다. 육류가 항상 야채보다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생긴 지위였다. 항생제가 없었던 시절에는 작은 동물도 잡기 어려웠다. 도망치는 동물을 잡다가 상처라도 입으면 치명적이었다. 사회 계층이 형성된 이후로는 고기를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는 능력보다 높은 지위를 보여 주는 징표는 없었다. 2016년에 출판된 마르타 자라스카(Marta Zaraska)의 저서 《고기를 끊지 못하는 사람들(Meathooked)》에서는 파라오가 사후 세계를 위해 방부 처리된 소고기 및 가금류 바구니인 ‘고기 미라’와 나란히 매장되어 있는 이집트 무덤을 발견한 기록이 나온다. 육류를 향한 인류의 집착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향후 10년 동안 개발 도상국의 육류 소비량이 급격히 증가할 것으로 전망한다. 단백질의 주공급원인 고기는 가장 큰 열망의 대상이며 번영의 확실한 증거로 남아 있다.
캐롤 애덤스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언어는 육식으로 인한 도덕적 문제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있다. 우리는 소가 아니라 소고기를 먹고, 돼지가 아닌 돼지고기를 먹는다. 하지만 양배추는 일생 어떤 형태이든 양배추로 불린다. 우리는 언어로 채소의 가치를 훼손시키면서까지 고기의 가치를 높이기도 한다. 근육질의 힘센 사람들을 ‘비피(beefy, 우람함)’라고 부르면서 게으른 사람들은 ‘카우치 포테이토(couch potatoes, 소파에 앉아 TV만 보며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라고 하고, 반응이 없는 조용한 사람들은 ‘베지터블(vegetables, 단조로운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육식에 등을 돌리는 것은 돼지고기를 끊고 퀀을 대신 먹는 것만큼 간단하지 않다. 우리 안에 고착화된 가치를 뒤집는 일이다.
그럼에도 대이동은 이미 진행 중인 듯하다. 영국 대학에 음식을 공급하는 기업 투코Tuco는 최근에 수많은 구내식당에서 육류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보고하면서, 비건이나 채식주의 식단이 학생과 직원들 사이에서 ‘메가 트렌드’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시내 중심가에서도 비건 식품은 잠깐의 기회를 틈타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잠재적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라는 인식이 늘고 있다. 그렉스의 비건 소시지 롤이 성공하자 테스코는 수요에 발맞추기 위해 식물성 제품의 범위를 거의 50퍼센트까지 늘릴 것이라고 발표했다.
비건 식품의 판매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1조 7000억 달러(2038조 원) 규모를 자랑하는 전 세계 육류 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 문화의 변화는 정부, 산업 및 과학의 개입 없이 일어날 수 없다. 지난 몇 년 동안 목격했듯, 변화는 싸움 없이 일어날 수 없다. 그래서 지금 일어나는 갈등은 불행에 가깝다. 우리는 현실 세계에서는 절제하면서 정서적으로 플렉시테리언을 지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비건을 둘러싼 가장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고 있는 온라인에서는 타협점을 찾을 수도, 기대할 수도 없다. 인터넷은 사람들을 격앙시키고 양극화했다. 이런 혼란 속에서 목소리를 낼 유일한 방법은 더 크게 소리치는 것이다.
우리가 고기를 너무 많이 먹는다는 것을 암시하는 일련의 증거는 부정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올여름 유엔 보고서는 기후 위기를 돌이킬 수 없을 지경으로 만드는 주요인으로 삼림 파괴와 소를 비롯한 집약적인 축산업에서 나오는 배출물을 꼽았다.
비건 나우(Vegan Now) 캠페인 출범 당시, 영국 왕실 변호사 마이클 맨스필드(Michael Mansfield)가 육식 행위를 불법화할 것을 주장한 연설처럼 일부에서는 긴급 조치를 제안하고 있다. 그는 육류 소비를 ‘흡연’에 빗대어 육류(특히 붉은 고기)가 새로운 담배가 되면, 육류가 건강에 좋지 않다는 다수의 인식 아래 소수의 사람만이 즐기는 나쁜 버릇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맨스필드는 ‘에코사이드(ecocide, 자연환경을 대규모로 파괴하는 행위)’를 반인륜 범죄로 분류하면서 논쟁을 새로운 틀에서 다뤘다. 우리가 지금 마주한 현실은 벼랑 끝이고 식물성 식단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이 안전한 길로 돌아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비건과의 전쟁은 유해한 삶의 방식을 지키려고 싸우는 불운한 다수의 행동이다. 비건들은 시끄럽고 성가시고 고결한 척하며 자기만족에 빠져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강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비건의 확산세가 일정 수준을 넘어선다고 해도 그렇게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이 옳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일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