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보틀의 디자인이 탁월한 이유는 고객이 경험하게 될 모든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디자인이기 때문이다. 블루보틀은 매장을 연극 무대처럼 꾸미고 바리스타를 배우로 생각한다. 모든 매장은 커피 바를 허리 높이 아래로 낮춰 바리스타, 고객, 커피라는 세 가지 요소가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만든다. 주연 배우인 바리스타를 중심으로 설계된 커피 바는 바리스타가 원두 그라인딩, 핸드 드립, 도구 세척 등 커피를 제공하기 위한 모든 과정을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빠르게 완수할 수 있도록 돕는다. 바 앞쪽에 저울이 있고 그 위에 바로 드립 용기를 얹을 수 있으며 저울 아래쪽에는 개수대를 배치해 남은 물을 버리고 세척을 할 수 있다. 세심하게 만들어진 이 바는 물을 끓이고 원두를 갈아서 넣고 커피를 내리고 용기를 헹구는 과정까지 한 자리에 서서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바리스타의 동선을 최적화한 디자인은 작업 효율을 끌어올리고 고객의 만족도를 높일 수 있다.
상업용 디자인은 단순히 예쁘기만 해서는 안 된다. 작업의 효율을 생각하는 디자인이 중요하다. 그런 관점에서 블루보틀의 매장 디자인은 최적의 상업용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블루보틀 매장은 쓰레기통의 위치와 모양까지 고려해 최고의 효율을 이끌어 내도록 설계되어 있다. 대기업의 해외 주재원으로 5년간 중국과 대만에서 근무한 뒤 스페셜티 커피 브랜드 카페 루고(Café Lugo)를 론칭한 김회중 대표의 블루보틀 매장에 대한 평가를 소개하고 싶다. 2015년에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찾아 스페셜티 커피로 유명한 브랜드들을 둘러보고 연구한 그는 인텔리젠시아(Intelligentsia), 필즈 커피(Philz Coffee) 등 유명 스페셜티 커피 체인과 블루보틀이 다른 점은 바리스타의 동선과 도구에 대한 지식이었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블루보틀은 핸드 드립을 할 때 물을 끓여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0.1도 단위로 온도 조절이 가능한 기계를 사용한다. 저울은 중량뿐 아니라 초 단위 시간이 같이 표기되어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양의 물을 넣어 정확한 맛을 내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최고의 커피를 제공하기 위한 방법을 집요하게 연구해서 도구를 개발하고, 이것이 자연스럽게 철저한 매뉴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유로운 힙스터(hipster) 느낌으로 알려진 블루보틀이 실제로는 스타벅스와 같은 고도의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말한다. 블루보틀의 비교 대상으로 자주 거론되는 애플의 창업자 잡스를 떠올린다면, 블루보틀은 자유분방한 히피였던 20대의 잡스가 아니라 아이폰을 만들어 전 세계인의 삶을 바꿔 놓은 50대의 잡스와 닮았다는 것이다.
바리스타의 동선을 최적화하는 효율적 요소 외에도 훌륭한 디자인의 효과는 또 있다. 바로 이런 디자인 덕에 SNS가 급성장할 때 블루보틀이 함께 성장할 수 있었다. 단순한 배경은 인물인 나를 더 돋보이게 해준다. 사진 어딘가에 보이는 작은 파란 병 로고는 내가 지금 가장 ‘핫’한 공간에 와 있음을 알려 주는 신호다. 방문객들이 SNS에 사진을 올리면 자연스럽게 홍보가 이루어진다. 블루보틀이 구글 벤처스의 투자를 받으며 온라인 사업을 강화하고, 페이스북 등 SNS 맞춤 전략을 세워 마케팅을 시작한 것은 2012년이다. 공교롭게도 페이스북이 인스타그램을 인수한 시기도 2012년이다. 2013년에는 영국 옥스퍼드 사전이 우리 표현의 셀카와 같은 ‘셀피(selfie)’를 올해의 단어로 꼽을 정도였다. SNS와 셀카가 전 세계적인 메가 트렌드가 된 것이다. 2012년 가입자 1000만 명이던 인스타그램은 빠르게 성장해 2017년 가입자 7억 명을 돌파했다. 세계 최고의 IT 기업을 투자자로 확보한 블루보틀은 자연스럽게 한발 먼저 SNS의 성장을 예측하고 그에 맞춘 브랜드 전략을 구사했다. 그 결과가 바로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블루보틀이다.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여러분도 SNS를 통해서 블루보틀을 처음 접하게 되었을지 모르겠다. 매장에 방문한 고객이 커피를 마시고 머그잔과 원두를 구매하는 것은 물론, 사진을 찍어서 홍보까지 해주니 이보다 이상적인 사업 모델이 있을까. 이것이 바로 잘 만들어진 브랜드의 힘이다.
블루보틀에는 입소문을 일으키는 흥미로운 스토리도 있다. 인간관계에서도 상대방이 살아온 과정을 알게 되면 더 친근감을 느낀다. 브랜드 역시 고객과 관계를 맺어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나눌 수 있는 스토리가 많을수록 좋다. 네이밍의 유래는 이야기하기 좋은 스토리 중 하나다. 스타벅스가 소설 《모비딕》에 나오는 일등 항해사의 이름이며 로고에 그려진 여성은 노래로 선원을 유혹하는 인어 사이렌이라는 이야기처럼 말이다. 블루보틀의 파란 병 역시 400년 넘게 이어져 온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블루보틀 이름의 유래는 이렇다. 1600년대 후반 오스만튀르크(오늘날의 터키) 군대가 거의 모든 유럽을 점령했을 때였다. 동부와 중부 유럽의 많은 지역을 휩쓴 오스만튀르크군은 1683년 오스트리아 빈까지 진격했다. 포위된 오스트리아군은 고립된 상황에서 감시망을 뚫고 인근 폴란드 군대에 도움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했다. 폴란드 외교관 출신으로 아랍어에 능했던 게오르그 콜쉬츠키(Georg Kolschitzky)가 발탁돼 오스만튀르크 병사로 위장하고 폴란드에 도움을 요청하는 데 성공한다. 치열한 전투 끝에 오스만튀르크군이 빈에서 물러났을 때, 그들이 남기고 간 물건 중에 낙타 사료 같은 콩 주머니가 있었다. 아랍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는 콜쉬츠키는 그것이 커피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쓸모없어 버렸던 커피 자루를 모아서 커피 가게를 차렸다. 그 가게의 이름이 바로 ‘푸른 병 밑의 집(Hof zur Blauen Flasche)’이다. 블루보틀이라는 브랜드는 여기에서 나왔다. 블루보틀의 심벌인 병의 색채가 단순한 블루가 아닌 터키 블루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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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가지 메뉴만 판매합니다
블루보틀은 여덟 가지 메뉴만 판매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지금은 모든 매장에서 여덟 가지가 넘는 메뉴를 판매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그렇게 알려져 있다. 로스팅한 지 48시간 이내의 원두를 사용하는 것 역시 4일 이내로 바뀌었지만 이를 굳이 적극적으로 알리지는 않고 있다. 이 역시 의도적인 브랜딩 전략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블루보틀이 창업 초기 ‘로스팅 48시간 이내의 원두로 여덟 가지 메뉴만 판매합니다’라는 짧은 문구를 반복적으로 활용해 홍보하면서 10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고객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산술적으로 여덟 가지 메뉴를 파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엄선된 메뉴만 판매하는 전문점이라는 이미지를 만드는 브랜딩이 중요하다.
프리먼이 초창기에 선별해서 판매했던 여덟 가지 메뉴는 드립 커피, 에스프레소, 카푸치노, 카페라테, 카페모카, 마키아토, 뉴올리언스 커피, 핫초코였다. 커피를 마시지 못하는 고객을 위한 배려로 포함된 핫초코를 빼면 모두 커피 메뉴다. 아메리카노는 없다. 에스프레소 머신을 갖춘 매장이지만 에스프레소에 물을 넣어 만드는 아메리카노 대신 정성껏 핸드드립으로 내린 커피만 판매하겠다는 고집이다.
아메리카노는 한 잔 만드는 데에 1분이면 충분한 경제적인 메뉴다. 원두 역시 12온스 분량 기준으로 핸드 드립의 절반인 15그램이면 충분하다. 아메리카노는 탬핑(tamping) 후 머신에서 추출한 에스프레소에 물만 부으면 되지만 핸드 드립은 한 명이 10분간 집중해서 제조해야 한다. 심지어 커피를 내린 뒤 드리퍼와 보틀도 씻어야 한다.
사업장에서 이 둘의 효율에 대한 비교는 무의미할 정도다. 제공 시간, 인건비, 원가 모든 측면에서 아메리카노가 월등히 높은 수익을 낸다.
게다가 일반적인 카페에서는 아메리카노의 점유율이 가장 높다. 그만큼 고객이 많이 찾는 메뉴라는 이야기다. 익숙한 메뉴를 취급하지 않으면 고객의 불만이 발생하기 마련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설득과 설명의 시간까지 필요하다. 이처럼 아메리카노를 팔아야 하는 이유는 셀 수 없이 많다.
그럼에도 프리먼은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가장 대중적인 메뉴를 취급하지 않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철학과 제품에 대한 자부심을 고객에게 전달하는 길을 택했다. 고객과의 대화를 즐겼다는 프리먼의 성향으로 미루어 보면, 그는 아마도 아메리카노를 찾는 고객에게 왜 아메리카노를 취급하지 않는지, 로스팅한 원두를 핸드 드립으로 내려 주는 커피가 얼마나 환상적인지에 대해 대화하는 것을 즐겼던 것 같다.
좋은 식재료, 정성, 스토리가 담긴 요리를 좋아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시간에 쫓기는 사람을 빼고 말이다. 프리먼은 시간을 최우선으로 삼는 사람들이 아니라 정성이 담긴 커피를 원하는 사람들을 자신의 고객으로 정했다. 그들은 대부분 커피를 사랑하는 마니아들이었을 것이다. 블루보틀은 얼핏 보기에는 상업적으로는 형편없는 결정을 했지만 그로 인해 소수의 커피 마니아들을 팬덤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이렇게 고객군을 명확히 구별하여 공략하는 방법은 애플이 초창기 고사양 퍼스널 컴퓨터로 컴퓨터 마니아들만을 겨냥했던 마케팅 전략과도 유사하다.
시그니처 메뉴
전문가가 엄선한 메뉴, 정성이 가득 담긴 핸드 드립 방식만으로 성공하기는 어렵다. 장인 정신을 바탕으로 핸드 드립 커피를 제공하는 곳은 이전에도 있었으니 말이다. 외식 브랜드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그니처(signature) 메뉴가 필요하다. 다른 곳에서는 맛볼 수 없는 그 가게만의 독특한 대표 메뉴가 있어야 바이럴(viral, 입소문)이 일어난다. 브랜드의 바이럴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경험한 고객이 주변에 이야기를 전파해야 하는데, 가장 좋은 소재가 바로 시그니처 메뉴다. 국내의 예를 들자면 평범한 커피 브랜드였던 탐앤탐스는 즉석에서 구워 주는 프레첼을 메뉴에 추가하며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서울 천호동 골목의 작은 카페였던 카페베네도 와플과 젤라토를 메뉴에 넣으며 초창기엔 와플 카페로 널리 알려졌었다. 아쉬운 점은 카페 브랜드임에도 시그니처 메뉴는 커피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블루보틀은 커피를 언제나 주인공의 자리에 앉힌다. 블루보틀에 가면 꼭 먹어 봐야 한다는 시그니처 커피 메뉴 두 가지를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