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우드 펀딩에서 멤버십까지
미디어 스타트업 퍼블리(PUBLY)는 “콘텐츠의 기획안만 보여 주고 판다”는 콘셉트로 2016년 1월 등장했다. 퍼블리는 소비자가 원하는 주제와 유형의 콘텐츠를 만들어 유통한다. 결제 방식은 다수의 개인에게서 자금을 모으는 크라우드 펀딩이다. 지적 콘텐츠에 크라우드 펀딩을 적용한 건 퍼블리가 국내 초기 사례로, 도입 당시 굉장히 신선하다는 반응을 얻었다. 퍼블리는 정식 사이트를 만들기 전에는 국내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인 텀블벅(Tumblbug)에 콘텐츠를 올려 모금했다.
개당 1만 원이 넘는 디지털 콘텐츠의 저자는 퍼블리의 직원이 아닌 외부 전문가다. 저자는 퍼블리가 선정한, 또는 저자가 직접 고른 해외 콘퍼런스에 참석해 A4 용지 50~100페이지에 달하는 리포트를 쓰고 오프라인 강연에서 현지 경험을 말한다. 이를테면 미국 텍사스 오스틴에서 열리는 음악·테크 축제 SXSW에 다녀온 저자가 취재 기록과 함께 생생한 후기를 전한다. 퍼블리가 발행하는 일, 라이프 스타일, 테크, 브랜딩, 미디어 분야의 콘텐츠는 웬만한 기사보다 깊이가 있다. 그렇다고 ‘스터디’만 하는 건 아니다. 피아노 콘서트, 맥주 파티도 연다. 그래서 회사 이름도 저자와 독자가 커뮤니티를 이루는 펍(pub), 콘텐츠 퍼블리싱(publishing, 출판)의 영문 앞 글자를 따서 지었다.
퍼블리는 목표 금액을 달성해야 상품을 내놓는다. 퍼블리의 전략은 리스크를 최소화한다는 점에서 ‘스마트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다수가 원하는 콘텐츠가 아니면, 일부 이용자의 구매 의사가 있어도 콘텐츠를 발행하지 않는다. 모금액이 목표액에 미달하면 프로젝트는 자동 취소된다.
흥행 성적은 어떨까. 퍼블리는 ‘장사’도 곧잘 한다. 콘텐츠와 오프라인 모임을 결합해 커뮤니티를 구축해 온 퍼블리는 소위 대박 콘텐츠들이 나오면서 이용자가 급속히 늘었다. 법인을 설립한 2015년 4월부터 2018년 8월까지 120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그중 102개는 목표 금액을 달성해 발행까지 이어졌다. 1000만 원을 넘게 번 프로젝트는 15개다. 2018년 8월, 퍼블리의 웹페이지에는 8개 프로젝트가 예약 판매 중이다. 상하이 조이 시티(Joy City)와 런던 바비칸 센터(Barbican Centre) 등 독특한 콘셉트의 공간을 취재한 리포트는 목표 금액인 100만 원을 471퍼센트 초과 달성했다. 마감일은 아직 보름이 넘게 남았다.
퍼블리는 2017년 7월 정기 구독 모델을 도입했다. 월 2만 1900원을 내면 이제까지 발행한 모든 콘텐츠를 읽을 수 있다. 모두 목표한 예약 금액을 달성한 ‘검증된’ 콘텐츠다. 2018년 8월 현재 사이트 가입자 수는 3만여 명, 예약 구매자를 제외한 멤버십 유료 고객은 3500명을 넘어섰다. 멤버십 고객의 월평균 재가입률은 85퍼센트에 달한다.
퍼블리는 지금까지 국내에 없던 기업이다. 언론사도, 출판사도 아닌 이 스타트업은 크라우드 펀딩을 통한 예약 구매에서 정기 구독으로 핵심 서비스를 바꿔 가며, 척박한 유료 콘텐츠 시장에서 쑥쑥 크고 있다. 퍼블리의 박소령 대표는 2018년 6월 자신의 페이스북에 장문의 글을 올려 서비스 아이덴티티가 ‘커머스(commerce, 판매)’에서 ‘콘텐츠’로, ‘소유’에서 ‘구독’으로 바뀌었음을 알렸다.
기술 스타트업의 성격도 강하다. 2018년 8월 기준 구성원 17명 중 8명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와 제품 디자이너, 그로스 매니저(growth manager)로 구성된 제품팀이다. 제품팀은 제품 개발과 사업 성장, 새로운 고객을 모으고 기존 고객을 유지하는 일을 담당한다. 제품팀뿐 아니라 모든 구성원이 데이터 분석 툴 앰플리튜드(Amplitude)를 기반으로 한 콘텐츠 가격 테스트 등 다양한 실험에 참여한다. 퍼블리에서 데이터 분석가는 곧 실행 담당자로 통한다. 의미 있는 분석 결과는 제품 개선과 가격 정책, 마케팅 전략에 곧바로 반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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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블리의 시도에 관심을 가진 건 론칭 첫해인 2016년이다. 퍼블리의 프로젝트가 30개를 막 넘은 때였다. 프로젝트 대부분이 목표 금액을 넘기고, 오프라인 모임까지 매진되는 현상이 신기해, 박 대표를 몇 차례 만나 비결을 물었다.
그로부터 2년 넘게 지켜봐 온 결과, 해답은 박소령 대표의 퍼스널 브랜드에 있었다. 그는 회사를 세운 지 3년도 안 돼, 이 분야의 인플루언서가 됐다. 퍼블리의 성장에는 박 대표의 1인 미디어가 큰 영향을 끼쳤다. 소셜 미디어, 신문 칼럼, 라디오, 강연을 넘나드는 그의 활동을 보면, 조나 페레티(Jonah Peretti) 버즈피드 창업자 겸 CEO가 떠오른다. 구글 검색창에 조나 페레티의 이름을 입력하면 1만 개가 넘는 인터뷰와 테크크런치, 리코드 등 각종 IT 콘퍼런스 발표 영상이 나온다.
퍼블리는 영국 잡지 모노클을 여러모로 닮았다. 실제로 박소령 대표는 모노클의 열성 팬을 자처한다. 유료 콘텐츠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도, 30대 지식층이 주요 고객인 것도 비슷하다. 이런 ‘팬심’을 보여 주듯 퍼블리는 2017년 5월 모노클의 미디어 행사를 다룬 시리즈 〈모노클, 미디어를 말하다〉를 발행하기도 했다. 2018년 3월에는 모노클이 한국 특별판을 펴내면서 퍼블리를 소개했다.
박소령 대표 인터뷰; “일(work) 콘텐츠에 집중…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구독 서비스”
박소령 대표는 학부에서 경영학을, 대학원에서 공공정책학을 전공하고 5년간 컨설턴트로 활동했다. 박 대표는 미디어 스타트업을 창업하게 된 계기로 학부 시절 읽은 토머스 프리드먼의 책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의 한 구절을 꼽는다. “세계를 설명해야 할 저널리스트와 세계를 만들어 가야 할 전략가는 급변하는 시대에 가장 중요한 직업이다.” 한때 기자 지망생이었던 그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전략가와 저널리스트가 접목된 일을 찾던 중 기성 언론사에 들어가는 대신 창업을 결심했다.
인터뷰이로 만난 박 대표는 완벽주의자였다. 출간을 앞두고 이메일로 추가 질문을 보냈고, A4 용지 10장 분량의 답변을 받았다. 덧붙여 인터뷰의 모든 코멘트는 2018년 8월 15일을 기준으로 한다고 강조했다. 미디어, 그리고 스타트업의 특성상 한 달이면 많은 것이 바뀔 수도 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실제로 퍼블리의 월 유료 구독자 수는 최근 6개월간 3.5배 이상 늘었다. 퍼블리는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콘텐츠 플랫폼 기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