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 101
4화

기본소득은 기존 복지를 대체하는가

슈퍼돼지 옥자와 미자는 터널 밖으로 달려나가고 동물해방전선의 트럭은 뒤쫓아 간다. 미란도 회사의 직원은 트럭 기사에게 다급하게 소리친다. “자, 출발, 출발!” 애써 쫓아갈 생각이 없는 트럭 기사는 심드렁하게 내뱉는다. “아이 몰라 XX(욕설). 나랑 뭔 상관이야. 어차피 XX(욕설), 이 바닥 떠 버릴 건데. 제가요, 1종 면허는 있는데 4대 보험이 없거든요,” 하면서 열쇠를 창밖으로 던져 버린다.

-영화 <옥자>의 한 장면

 

화물차 운전이 가능한 자동차 1종 운전면허는 있는데 4대 보험 가입이 안 되어 있었던 이 노동자의 법적 명칭은 ‘특수형태근로종사자’다. 회사와 통상적인 근로 계약을 맺지 않고 자영업자로서 계약을 맺는 노동자를 말한다. 줄여서 ‘특수고용직’ 혹은 ‘특고’라 불리는 이 노동자들은 법적으로 노동자가 아니라 ‘사업자’였기 때문에 그동안 4대 보험의 사각지대에 있었다. 다행히 2021년 7월부터 택배 기사, 보험 설계사, 화물차주 등 12개 직종의 고용 보험 적용이 가능해졌고 2022년 1월에는 대리운전, 퀵서비스 등 두 개 업종이 추가된다. 산재 보험은 회사가 100퍼센트 부담하는 일반 노동자와 달리 아직 보험료의 50퍼센트를 내야 하지만, 역시 확대 적용되고 있다.

고용 보험, 산재 보험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고 있지만 국민연금과 건강보험 문제는 여전하다. 국민연금공단 자료에 따르면 166만 명으로 추산되는 특고 종사자 중 2021년 상반기까지 37.5퍼센트인 62만여 명만이 국민연금에 가입했으며 그중 48.3퍼센트는 국민연금 납부를 못 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연금 납부자가 특고 종사자 열 명 중 두 명도 안 됐다는 얘기다. 코로나 등으로 인한 소득 감소도 원인이겠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 일반 노동자는 회사와 노동자가 4.5퍼센트씩 나눠 내지만 특고 종사자는 지역 가입자로서 9퍼센트의 국민연금 보험료를 혼자 다 내야 하는 것이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기본소득 논의에 4대 보험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있다. 앞에서 기본소득 대신 전 국민 고용 보험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어떤 정치인 얘기가 기억날지 모르겠다. 보수파들은 기본소득이 사회주의라며 거부하는 반면에, 진보적 복지 국가론자들은 기본소득이 기존의 복지 제도를 위태롭게 만들 것이라며 기본소득을 반대한다. 그들은 기본소득과 같은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기보다는 4대 보험 같은 기존 복지 제도의 단점을 보완하고 대상을 확대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또한 기존의 복지 제도는 복지 수혜가 필요한 사람을 타기팅(targeting)하는 반면에 기본소득은 모두에게 무차별적으로 지급하므로 비효율적이며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한다.

진보적 복지 국가론자들은 4대 보험 등 기존의 복지 제도에 써야 할 재원을 기본소득에 쓰게 되면 결국 기존의 복지 제도가 약화되거나 붕괴할 것으로 본다. 그들이 보기에 기본소득은 복지의 강화가 아니라 복지의 부정이다. 복지 국가를 이루기 위해서 기본소득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복지 국가론자들의 이러한 주장은 선의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사실과 다르다. 게다가 기본소득이 모두에게 똑같은 액수를 지급하기 때문에 비효율적이고 불의하다는 주장은 오해다. 동일한 지급이 어떻게 정의로운가?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20세기 복지 국가에 대해서 먼저 알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복지 국가가 ‘역사적’ 존재라는 점을 이해해야만 기본소득이 갖는 지위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20세기 복지 국가의 구조


기본소득은 기존 복지와 어떤 관계일까? 많은 사람들이 유럽의 복지 국가를 부러워한다. 그런데 복지 국가라 하면 국가가 국민의 삶을 보장한다는 국가-시민의 관계 속에서 생각할 뿐, 그 내부 구조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지금의 복지 제도가 갖는 한계는 복지 국가가 역사적 산물이라는 점에 기인한다. 지금의 복지 제도가 왜, 어떤 맥락에서 생겼는지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기본소득의 역할 그리고 복지 제도와의 관계성은 20세기 복지 국가의 구조를 톺아봄으로써 반추할 수 있다.

사회 보험과 공공부조

산업혁명 이후 19세기 자본주의의 발전은 자본가와 노동자의 갈등 및 대립을 심화시켰다. 노동자는 비참한 삶의 현실에 놓여 있었고 이들을 대변하는 정치 세력이 성장했다. 독일에서는 1875년 통합된 사회민주당이 출범하여 노동자 정치 운동이 만개하게 된다.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1878년 ‘사회주의진압법’을 도입하여 노동 운동에 타격을 가하고자 했지만, 이 법에도 불구하고, 아니 이 법 덕분에 사회민주당은 오히려 지지자가 늘고 제국 의회의 의석수도 늘었다.

비스마르크는 노선을 전환했다. 노동 운동을 탄압하는 것보다 노동자의 삶과 처우를 개선하는 조처를 하는 것이 혁명을 막고 사회민주당을 온건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1883년 세계 최초의 사회 보험법인 ‘질병보험법’이 통과되었다. 뒤이어 1884년에는 ‘재해보험법’, 1889년에는 ‘양로·폐질보험법’이 잇달아 통과되면서 사회 보험의 시대가 열렸다. 영국은 1911년 ‘국민보험법’이 통과되어 질병만이 아니라 실업에 대비한 보험이 처음 시작되었고, 1920년대에 대부분의 유럽 국가로, 1930년대에는 북미와 남미로 사회 보험이 확대됐다.

1883년 독일에서 질병보험을 처음 도입할 때 보험료의 삼 분의 일은 사업주가, 나머지는 노동자가 냈다. 한국의 4대 보험도 이 원형을 따랐다. 사업주와 노동자가 국민연금은 각각 급여의 4.5퍼센트씩, 건강보험은 각각 3.12퍼센트씩, 고용 보험은 각각 0.65퍼센트씩 함께 부담하고 산재 보험은 사업주가 전부 부담하고 있다. 요컨대 사회 보험에 담긴 의미는 노동자의 질병, 노령, 재해, 실업 등에 대비할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자본가와 노동자가 협력한다는 것이다. 노동자는 혁명을 포기하고 사업주는 이윤의 일부를 양보하여 노동자의 복지에 사용하는 협치의 제도, 코포라티즘(Corporatism)이다. 국가는 노와 사를 조정하고 사회 보험을 설계·운용하는 역할을 진다. 소위 ‘노사정 합의’ 모델인 것이다.

사회 보험은 노동자가 표준적 고용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전제한다. 게다가 정규직 남성 노동자의 노동 시장을 전제해 만들어졌다. 여성과 아동은 ‘부양가족’이 되어 정규직 남성 노동자의 임금에 의존해 살아가고 가구 단위의 생계가 꾸려진다. 남성 생계 부양자가 고용 상태인 생애주기에는 안정적인 임금이 보장되므로, 부양자의 소득 활동이 중단되는 ‘위험’에 대비한 사전 예방의 제도로 충분했다.

그러나 가구 구성원 중 경제 활동에 참여한 사람이 없다면 사회 보험 가입이 불가능하고, 경제 활동을 하고 있더라도 소득이 낮거나 불안정하다면 안정적인 사회 보험 가입자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구제책이 필요했다. 그것이 곧 한국의 ‘국민 기초 생활 보장’과 같은 공공부조 제도다. 사회 보험이 보험료 납부를 조건으로 하는 사전 예방의 보상적 급여라면, 공공부조는 조세를 재원으로 하는 사후 구제의 생존권적 급여에 해당한다.

17세기 영국의 ‘엘리자베스 구빈법(救貧法)’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공공부조는 “자산 조사에 기초하여 필요한 사람들에게 삶의 최저 수준을 보장하기 위해 제공되는 급여와 서비스의 총칭”으로 정의된다. 한국의 국민 기초 생활 보장법은 IMF 사태 이후의 심각한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0년부터 시행됐다. 박근혜 정부 들어 ‘맞춤형 급여’로 세분화되어 생계급여, 의료급여, 주거급여, 교육급여의 형태로 시행되고 있고, 각각 “소득인정액”이 기준치 미만이어야 “기초생활 수급자”가 될 수 있다. 여기에다 의료급여는 직계 혈족과 그 배우자 중에 부양 가능한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부양의무자” 기준까지 있다.

즉, 일할 수 있는 연령의 사람(주로 남성)은 시장에서 노동을 하고, 그의 임금에 근거해서 가구주와 부양가족의 생계가 보장되며, 그 생계 부양자가 더 이상 노동할 수 없는 위험 상황에 대비해서 노사 합동으로 보험을 적립해 두고, 노동에 의한 생활도 보험 대비도 여의치 않은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 공공부조를 제공하는 이런 구조를 통해서 서구 복지 국가는 작동했다. 문제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다른 체제에 비해 서구 복지 국가는 나름의 발전을 거듭했고 한동안은 무리 없이 잘 굴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1970년대에 위기가 시작된다.

금융자본주의와 플랫폼 자본주의

1973년 산유국의 원유 생산 감축과 가격 인상으로 발발한 ‘오일 쇼크’는 복지 국가의 내적 모순을 드러냈다. 몇 배로 치솟은 원자재 가격은 고도성장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고, 그 결과 고도성장을 전제로 그 과실을 함께 나눈다는 개념의 케인스주의(Keynes principle) 복지 국가 체제는 흔들렸다. 성장 둔화에도 불구하고 노동 운동의 조직적 힘 그리고 사회 복지 체제가 보장해 주고 있던 노동자의 권리는 지속되자, 전체 소득 중 임금의 몫이 커지고 자본이 이윤으로 가져가는 몫은 줄어들게 됐다. ‘이윤 압박(profit squeeze)’에 직면한 자본은 보수주의 정치 세력과 손을 잡고 저돌적인 신자유주의 체제를 출범하게 된다.

줄어든 이윤의 몫을 키우기 위해 신자유주의 체제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노조의 분쇄였다. 마거릿 대처의 석탄 산업 합리화 정책에 맞선 영국 노동자들의 파업은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Billy Elliot)>의 배경으로 잘 표현돼 있다. 이 싸움에서 영국 노동자들은 패배했다. 1980년 영국의 노조 조직율은 51.7퍼센트였는데 2014년에는 25.1퍼센트까지 떨어졌다. ‘민영화’를 기치로 전기, 가스, 철도 등 기간산업을 포함한 많은 공기업들이 사유화됐는데, 심지어 교도소까지 민영화될 정도였다. 오로지 더 많은 이윤을 내는 것이 ‘선’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윤의 몫을 키우려는 자본의 공세는 금융 자본주의의 만개로 완성됐다.

금융 자본주의 체제 아래 금융에 대한 규제는 완화되고 선물, 옵션 등 새로운 금융 상품과 기법이 출현했으며 사모펀드, 헤지펀드 등 새로운 형태의 금융 자본도 등장했다. 산업 생산과 관계없는 금융 상품의 거래를 통해 이윤이 창출되고, 투기적 금융 자본이 국경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막대한 이익을 거뒀다. 부의 양극화는 극에 달했다. 금융 자본주의 체제는 기존의 산업 생산의 구조도 바꿨다. 기업의 주요 자금줄인 주식 시장의 지위가 중요해지면서 기업은 주주 이익 실현의 극대화를 기업 활동의 핵심 목표로 삼았다. ‘더 많은 이윤’이라는 절대 명제 아래 생산 현장은 변모했다.

대표적인 것이 ‘프랜차이징(franchising)’이다. 기업은 자신의 비즈니스 모델을 판매하고 관리 업무에 주력하면 되므로 기업의 비용은 최소화되고 원래 기업이 책임져야 할 사업 확장을 전부 독립적인 자영업자가 맡게 된다. 또한 외주(outsourcing), 파견, 하청 등의 방식으로 조직의 규모를 줄이고(downsizing) 인건비, 사회 보험료, 관리 비용, 복지 비용 등을 절약하며 산업 현장에서 발생하는 각종 위험 또한 외주화하는 전략이 성행했다. 과거의 산업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기업이 책임져야 할 임금 노동자들이 전부 기업 외부에 존재하게 됨으로써 ‘표준적 고용 관계’에 기초한 노동 환경은 해체되기 시작했다.

정규직은 줄어들고 비정규직이 늘어나며, 동시에 영화 <옥자>의 트럭 기사처럼 노동자도 사업주도 아닌 비공식 노동자들이 등장하며 다수의 영세 자영업자가 양산되는 풍경은 이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다. 이들은 노동 가능 연령기에 노동 시장에 속해 있지만 표준적 근로 계약 관계에 있지 않은 이유로 기존의 사회 보험 대상에서 배제된다. 혹은 사회 보험 가입자가 되더라도 고용 상태가 불안정하므로 사회 보험을 들락날락하는 일이 허다하고, 꾸준히 사회 보험 영역에 있더라도 소득이 미미한 관계로 위험에 대한 예방이 충분치 못하다. 그렇다고 공공부조가 이들을 도와줄 수도 없다. 공공부조가 정한 빈곤선 이하에 있지 않은 이상 공공부조의 엄격한 자산 조사를 통과할 수 없다. 전통적 사회 보장 제도가 커버하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크게 넓어진 것이다.

복지 제도의 위기를 가져온 또 다른 경제 구조의 변화는 1990년대부터 본격 진행된 ‘플랫폼 자본주의’의 등장이다.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서 생산, 판매, 중개, 배송, 배달이 이루어지는 플랫폼 경제의 등장으로 ‘플랫폼 노동’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비공식적‧비표준적 노동 형태가 탄생했다. 플랫폼 노동은 빅데이터와 알고리즘, 고객의 평점 등에 의해서 산업 노동자보다 더 철저한 통제와 종속 아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자리가 아니라 일감의 형태로 일이 이뤄진다. 고정적 사업장에서 진행되지 않고 계약 관계에서 고용주를 특정하기도 어려워 플랫폼 노동자는 법률상의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지속적으로 플랫폼 노동자의 ‘노동자성’을 인정받기 위한 싸움이 이루어지고 있고 법원의 판결도 이어지고 있지만, 법과 판결이 포괄하지 못하는 새로운 형태의 플랫폼 노동이 시시각각 탄생하고 있다.

금융 자본주의와 플랫폼 자본주의로의 이행은 노동자의 노동 환경만을 바꾼 것이 아니다. 복지 국가의 한 축인 노동자를 둘러싼 조직적 환경도 크게 바꿨다. 수천, 수만 명의 노동자가 거대 작업장에 모여 함께 일하던 시절은 영원히 사라졌다. 제조업 남성 노동자의 집단적 단결을 바탕으로 했던 노동조합의 힘도 당연히 약화했다. 노사의 균형과 합의에 기초해 성립된 복지 국가의 역관계는 급속도로 자본 측으로 기울었다.

외부의 위협

2차 세계 대전 이후 서유럽에 사회 민주주의 복지 국가가 발전한 데에는 외부 환경도 크게 작용했다. 그것은 소련을 맹주로 한 ‘현실 사회주의’의 위협이었다. 1946년 동유럽에 소련 체제가 이식되고 1949년 중국에서는 중국공산당 마오쩌둥이 이끄는 ‘신민주주의’ 혁명이 성공했다. 1957년 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 올리고 1959년 미국 턱밑에서 쿠바 혁명이 성공하자 자본주의 세계 체제에 위기감이 고조됐다. 소련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는 “당신들을 묻어 버리겠다. 당신들의 노동자 계급이 당신들을 묻어 버릴 것이다”라고 호언했다.

애초에 비스마르크가 노동자 혁명을 막기 위해서 사회 보험을 시작했듯이, 전후 복지 국가를 위한 부유층의 양보 뒤에는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체제를 지키기 위한 동기가 작동하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모든 것을 잃는 것보다 조금 덜 가져가는 것이 현명하다는 깨달음이야말로 서유럽 복지 국가의 숨은 비밀이다. 그러나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1991년 소련의 붕괴는 그런 외부 위협을 일거에 소멸시켰다. 미국의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역사는 끝났다”라는 유명한 말로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역사적 승리를 기념했다. 이제 자본 측은 고용 구조라는 제도적 측면에서도, 노동조합과의 역관계 상으로도, 외부로부터의 체제 위협에 있어서도 노동 측에 양보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신자유주의의 진격은 야수처럼 거칠 것이 없게 된 것이다.

 

기본소득이 있는 새로운 복지 국가의 구상


이제까지 1970년대 이후의 자본주의 전개 과정에서 어떻게 복지 국가가 후퇴하게 되었는지 살펴봤다. 이 과정은 여성의 노동 시장 진출과 함께 진행되었는데, 여성 노동자가 증가한 원인에는 이 변화의 맥락을 읽을 수 있는 다양한 의미가 있다. 첫째,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과거보다 높아졌다. 둘째로 남성 생계 부양자의 임금 하락으로 부양가족 모두의 생계를 보장할 수 없게 됐다. 셋째, 전통적 제조업 중심에서 서비스업, 플랫폼 노동으로 이행함에 따라 여성 노동자의 유입이 용이해졌다. 마지막으로 여성 노동자의 임금이 남성 노동자의 임금보다 낮아 주주 자본주의의 이윤 추구라는 이해관계에 부합했다. 이 과정이 보여 주는 결과는 참담하다. 이젠 온 가족이 나가서 일을 해도 먹고 살기 빠듯한 세상이 된 것이다.

한마디로 산업 자본주의 시대를 배경으로 형성된 복지 국가의 핵심 프로그램인 사회 보험과 공공부조는 변모한 자본주의 시대와 노동 환경에 맞지 않는 ‘부정 교합’의 제도가 된 셈이다. 무의미해졌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딱 이가 맞물린다고 말할 순 없다. 사회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사각지대’를 해결하기 위해서 정책 수혜자 그룹에 몇몇 특고 종사자, 플랫폼 노동자를 추가하는 것은 땜질 처방에 불과하다. 보다 근본적 대책으로서 ‘근로 계약 중심의 사회 보험’ 제도를 ‘소득 중심의 사회 보험’ 제도로 전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특정 사업주에 대한 종속성이 분명치 않더라도 경제 활동의 결과로 소득이 발생한 모든 사람을 사회 보험의 대상자로 삼아야 한다.

사회 보험의 재원은 여전히 보험료겠지만 보험료의 부과 방식 역시 달라져야 한다. 현재 사업주가 내는 보험료 액수는 그 사업주가 고용한 노동자의 보험료를 따른다. 그래서 자동화가 덜 진행된 제조업체의 사업주는 자동화 공정이 많은 사업주보다 이익이 적은데도 불구하고 고용한 노동자가 상대적으로 많아 보험료 부담이 더 크다. 소득 중심 사회 보험으로 전환되면 사업주가 내는 보험료는 그 사업주의 이익에 비례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사회 보험을 전환하면 ‘사각지대’도 사라지고 불공정한 보험료 부과도 없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이미 노동자의 소득 자체에 큰 격차가 생겼기 때문에 보험료 부과액의 격차도 커진다. 이는 결국 연금 등 사회 보험 급여의 큰 격차로 귀결된다. 일감이 불안정한 사람들은 보험료 납부도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고 누적된 보험료 적립액은 더 작아진다. 결국 완전 고용 시대의 안정된 직장에서, 상대적으로 급여 수준이 비슷한 남성 노동자 중심으로 설계된 사회 보험 제도로는 그 근본적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

무엇보다 사회 보험은 일하는 동안에는 문제가 없는 것을 전제하고, 앞으로 노령, 질병, 재해 등의 위험이 발생할 것을 대비한다는 개념이다. 하지만 소득이 낮고 불안정하다는 것은 지금 이미 위험이 상존한다는 것이다. 현실에선 사회 보험에 넣어 준다고 해도 빠지고 싶은 사람이 많다.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사는데 보험료까지 다 내고 나면 어떻게 생활하란 말인가? 그렇다고 사회 보험을 없애자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사회 보험만으로는, 아니 사회 보험 개혁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고 기본소득이 그와 함께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회 보장 제도의 1층에 기본소득이라는 완충 장치를 놓고 2층에 사회 보험이라는 안전장치를 설치해야 한다.

공공부조는 점차 사라져야 할 복지 제도다. 전술했듯이 자신의 빈곤과 장애, 비참함과 무능력을 끊임없이 입증해야 하는 제도는 인권에 반한다. 스스로 ‘루저’라고 끊임없이 외치게 만드는 낙인의 제도는 바람직한 사회 심리적 결과를 발생시킬 수 없다. 공공부조는 ‘빈곤의 덫’도 만들어 낸다. 현행의 기초생활 수급자는 근로 소득이 발생하게 되면 그 근로 소득의 70퍼센트만큼을 생계급여에서 감한다. 50만 원의 생계급여를 받다가 50만 원의 근로 소득이 생기면 총소득이 100만 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65만 원이 된다. 열심히 일해서 한 푼 두 푼 저축을 하게 되면 자산이 늘었다고 ‘소득환산액’이 늘어난다. 노점이라도 하려고 트럭을 사면 자동차 가액도 소득 환산에 들어간다. 공공부조는 수급자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오히려 처벌하는 제도다. 그 결과 영원히 수급자의 ‘덫’을 벗어날 수 없다.

만약에 그 50만 원이 생계급여가 아니고 기본소득이었다고 가정해 보자. 50만 원의 근로 소득이 생겼다면 총소득은 100만 원이 되었을 것이다. 기본소득은 ‘무조건성’의 제도이기 때문이다. 돈이 많건 적건 소득이 있건 없건 기본소득은 변함이 없다. 물론 더 일하지 않아도 된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 폭이 넓어진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산 조사에 근거한 공공부조’는 ‘권리에 근거한 기본소득’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생계급여 등 국민기초 생활 보장 제도를 하루아침에 폐지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각 제도의 성격에 맞게 현금성 급여와 서비스 급여를 구분하고 현금성 급여를 기본소득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의미다. 대체 시기는 기본소득 액수가 기존 현금 수급액을 초과하는 시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수급자의 수급액이 줄어들지 않게 하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서구 복지 국가에는 아동수당, 양육수당, 노인수당, 장애수당 등의 각종 ‘사회 수당’ 제도가 발전해 있다. 우리나라에도 박근혜 정부 때 시작된 기초연금인 노령수당과 문재인 정부 때 시작된 아동수당, 그리고 장애인연금과 장애수당 등이 존재한다. 사회 보험과 공공부조가 있는데도 새로운 복지 제도인 사회 수당이 발전했다는 것 자체가 사회 보험과 공공부조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복지 사각지대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다.

사회 수당이 특정 인구 집단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에 비해 기본소득은 전 인구 집단을 대상으로 한다. 그렇다고 기본소득은 사회 수당이 대상으로 하는 인구 집단을 다 포함하므로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사회 수당은 전면 폐지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특정 사회 수당의 존재 이유와 성격을 면밀히 검토하고 기본소득 액수와의 비교 등을 거쳐 정교한 시스템을 구성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월 10만 원의 아동수당은 월 30만 원의 기본소득이 도입될 때 즉시 폐지하면 되지만, 장애인연금과 장애수당은 존재 이유와 필요성이 더욱 선명하므로 개혁된 형태로 존재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회서비스가 있다. 보편적인 공공 사회서비스의 폭넓은 제공이야말로 유럽 복지 국가의 가장 큰 성과다. 국민에게 기본소득만을 주고 필요한 서비스는 시장에서 알아서 구매하라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신자유주의적으로 왜곡된 기본소득’일 것이다. 그것은 기본소득이라기보다는 날것의 시장에 벌거벗은 채로 던져지는 소비자를 위한 푼돈에 가깝다. 기본소득으로 시장에서 돌봄, 주거, 의료, 교육 서비스를 구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그건 오독이다.

기본소득은 공공 서비스와 제로섬 관계가 아니다. 함께 균형적으로 발전해야 한다. 소득 보장과 서비스 보장은 상호 보완적으로 공존해야 한다. 사회서비스가 먼저고 기본소득은 나중에 해야 한다거나, 기본소득을 하면 기존 사회서비스가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는 옳지 않다. 복지 국가의 역사를 살펴보면 현금성 복지와 서비스 복지 중 하나가 발전하면 다른 하나가 따라서 발전해 왔다. 우리나라의 돌봄, 주거, 의료, 교육 등의 서비스는 지나치게 시장에 의존하고 있다. 예컨대 우리나라 공공 임대 주택의 비율은 8퍼센트가량인데 유럽의 사회주택 비율 평균은 20퍼센트에 달한다. 고등학교의 사립 비중도 40퍼센트로 OECD 회원국 중 가장 높다. 대부분의 대학이 국공립인 유럽과 정반대로 우리나라 대학생의 75퍼센트는 비싼 등록금을 내며 사립대를 다닌다.

사회서비스의 공급 주체로서 국가와 지자체의 책임을 강화하여 공공 서비스를 위한 지출을 늘리고 공공 서비스의 질을 높여야 한다. 특히 사회서비스는 지역적 격차가 매우 크다. 예컨대 의료의 경우 국민건강보험은 발전해 있지만 정작 의료 기관, 특히 제 3차 의료 기관은 수도권에 편중되어 있다. 이런 사회서비스의 지역적 격차는 수도권 인구 집중을 강화하는 요인이 된다. 따라서 ‘탈상품화’된 공공 서비스의 발전은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국가적 사명을 위해서도 절대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다.

‘기본소득인가 복지 국가인가’라는 질문은 잘못된 접근이다. 이젠 ‘기본소득이 없는 복지 국가인가, 기본소득이 있는 복지 국가’인가를 논해야 할 때다.

 

동등한 지급이 어떻게 정의로운가


하나의 사고 실험을 해보자. 1인당 연간 평균소득이 5000만 원이지만 소득 불평등이 심한 어떤 나라가 있고 당신은 그 나라의 보건복지부 장관이다. 딱 하나의 소득 보장 정책을 선택해야 한다면 어떤 것을 선택하겠는가?

① 모두에게 20퍼센트의 소득세를 부과하여 재원을 마련하고, 모두에게 1000만 원씩 나누어 주는 안.
② 평균소득(5000만 원)을 넘는 액수에 대해서만 20퍼센트의 소득세를 부과하여 재원을 마련하고 평균소득 미만인 사람에게만 지급하는데, 소득이 0이면 1000만 원, 소득이 1원씩 늘 때마다 지급액을 20퍼센트씩 줄여서 지급하는 안.

1안은 쉽게 알 수 있듯이 보편적 기본소득 안이다. 2안은 재원에 대한 기여를 소득 수준에 따라 차등화하고 지급액도 소득 수준에 따라 차등화하는 선별 지급 안이다. 물론 기본소득 지지 여부에 따라 이미 선택을 내렸을 수 있지만 위 상황만을 독립적으로 다시 생각해보자. 어느 것이 더 정의로운가? 어느 것이 소득 불평등이 심한 나라의 소득 재분배와 불평등 개선에 더 도움이 되는가? 어느 것이 저소득층에게 더 유리한가?

그렇다면 2안이 옳다고 생각하기 쉽다. 사회보장에 대한 상식에 준하고 인도주의적으로 느껴질 뿐만 아니라 재원의 규모가 작아 더 효율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두 개는 똑같은 안이다. 소득 불평등이 심하고 평균소득이 5000만 원인 어떤 나라에 일곱 명이 산다고 단순화하여 표를 만들어 비교하면 쉽게 알 수 있다. 물론 한국의 실제 소득 불평등 수준은 이보다 훨씬 크지만 말이다.
먼저 1안이다. 소득의 차이가 있으므로 20퍼센트의 ‘단일 세율’을 적용하더라도 각자가 내는 ‘세액’에는 차이가 생긴다. 평균 5000만 원을 기준으로 그 아래는 소득세로 내는 것보다 기본소득으로 받는 것이 크고 그 위는 소득세로 내는 것이 기본소득으로 받는 것보다 크다. 5000만 원 초과 소득자는 순기여자(net contributor), 5000만 원 미만 소득자는 순수혜자(net beneficiary)가 된다.

2안의 경우 5000만 원을 넘는 액수에 대해서만 20퍼센트 소득세를 부과한다. 예를 들어 8000만 원의 소득을 번 사람은 5000만 원을 초과한 액수인 3000만 원에 대해서 그 20퍼센트인 600만 원의 소득세를 내게 된다. 양(+)의 소득세를 내는 사람은 표와 같이 그만큼 가처분 소득이 줄어든다. 5000만 원 미만의 소득자는 소득세를 내지 않고 받게 되는데, 이것을 소득세 개념으로 하면 ‘음(-)의 소득세를 낸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래서 2안과 같은 소득 보장책을 ‘음의 소득세(negative income tax·NIT)’라고 부른다.
 
음의 소득세 구상은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이 주장한 모델이 가장 대표적이다. 음의 소득세는 보통 가구별로 지급하고 세율도 다르게 설정하는 등 세부 설계는 다양할 수 있지만 기본 구도는 위와 같다. 특정 소득을 기준점으로 그 위는 내는 사람, 그 아래는 받는 사람으로 구성되며 그 액수를 차등화한다는 것이다. 기본소득인 1안과 음의 소득세인 2안을 문장화했을 때는 분명히 다른 것처럼 보이는데, 내고 받은 것을 결산한 순(net) 금액은 표에서 보는 것처럼 동일하다. 수학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두 개가 똑같은 결과값을 보이리란 사실을 처음부터 눈치챘을 것이다.

이 사고 실험은 직접 구상한 것이 아니라, 전 세계 4000만 권 이상이 팔린 《경제학원론(Principles of Economics)》의 저자로 유명한 그레고리 맨큐(Greg Mankiw)가 2016년에 자신의 블로그에 쓴 〈A Quick Note on a Universal Basic Income〉이라는 글이다. 맨큐는 1안을 말하면 사람들은 왜 빌 게이츠에게도 돈을 주냐며 미친 생각이라 치부하는 반면, 2안은 정말 필요한 사람만을 선별(targeting)하는 더 진보적인 안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사실 두 안의 차이는 오직 포장(framing)의 차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아 해 다르고 어 해 다른’ 착시 현상이다.

우리나라에는 2안의 어법과 프레임을 가지고 1안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다. 요컨대 ‘2안이 더 정의롭다’는 것이다. 왜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에게도 주는지, 이 부회장에게 줄 돈이 있으면 가난한 사람에게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닌지와 같은 불만이다. 흥미롭게도 이렇게 주장하는 언론과 지식인 중 가난한 사람들을 정말로 위하는 사람들은 적다. 대개 2안을 진정으로 할 의사도 없으면서 1안을 막기 위해서 2안의 논리를 펼친다. 그리고 이미 살펴보았듯이 이런 논법은 혹세무민(惑世誣民)이다. 의도에 따라선 선동이라 부를 수도 있다. 2안을 찬성하면서 1안을 반대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금전적으로 두 안이 같기 때문이다.

“금전적으로” 두 안이 같다면 굳이 1안을 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말에 답이 있다. 금전적으로 같은 설계라 하더라도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떻게 설명하는가, 어떻게 실행하는가에 따라 그 둘은 전혀 다른 것으로 작동할 수 있다.

1안에서 사람들이 1000만 원을 받는 이유는 모두가 다 받기 때문이다. 거창하게 표현하면 모두가 누려야 할 ‘권리’로서 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2안에서 5000만 원 이하 소득자는 왜 돈을 받는가? 평균 이하의 저소득자이기 때문이다. 2안의 어법은 평균 ‘이상’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평균 ‘이하’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일종의 ‘시혜’다. 따라서 2안에서 수급자는 사회의 ‘루저’라는 낙인을 얻게 된다.

이것은 2011년 서울시 무상 급식 논란과 동일한 사회적, 심리적 함의를 품고 있다. 1안에서는 수급자가 당당히 서서 받을 수 있지만, 2안에서는 무릎을 꿇고 받아야 한다. 공공부조에서 살펴봤듯이 이러한 철학적, 심리적 차이는 사회 복지 정책의 결과에 큰 차이를 가져온다. 2안의 지지자들은 2안이 어려운 사람을 더 두텁게 지원하는 인도주의적 정책인 것처럼 포장하지만, 실은 공공부조의 수급자가 겪는 것과 같은 굴욕감과 수치심을 유발하는 비인간적 방법을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수급자의 사회적 처지가 다르다는 이 중대한 사실은 재원 마련의 논리적 차이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1안에서는 모두에게 과세한다. 즉 이 제도의 집행과 성공을 위해서 자신의 능력에 맞게 모두 함께 기여한다는 연대의 정신이 작동하고 있다. 모두가 기여하고 모두가 받는 것이다. 이와 달리 2안은 ‘있는 자’들이 ‘없는 자’들을 돕는 구도다. 2안은 사회를 두 개 계급, 즉 혜택을 주는 자와 혜택을 받는 자로 나눈다. 이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앞서 우리는 1안과 2안이 금전적으로 똑같다고 가정했지만, 이것은 이론적으로 가능한 것일 뿐 현실에서 2안은 재원 마련을 위한 증세가 어렵고 이에 따라 복지 규모가 축소된다. 한쪽은 일방적으로 퍼주기만 한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심리적 토대 위에서는, 퍼주는 사람이 조세를 회피할 명분이 더 크다. 모두가 보편적으로 그 제도에 기여하고 모두가 보편적으로 그 제도의 권리를 누린다는 기본소득의 논리여야 재원의 규모를 키우고 복지 수혜를 확대할 수 있다.

지급 방식의 차이 역시 중요하다. 기본소득은 선지급이다. 모두에게 아무 조건 없이 동일한 액수를 지급하기 때문에 소득과 자산 조사 없이 일단 먼저 지급할 수 있다. 지급이 먼저 이루어지고 뒤에 소득세를 과세할 때 거둬들이면 된다. 이때 앞의 표처럼 동일한 세율을 적용할 수도 있고 누진 세율을 채택할 수도 있다. 음의 소득세는 시장 소득이 확정된 연후에야 지급액을 산정할 수 있기 때문에, 비례 세율이건 누진 세율이건 소득세 과세와 동시 혹은 이후에 지급이 이루어진다. 미국의 ‘근로장려세제(Earned Income Tax Credit·EITC)’는 이전 해의 노동 소득에 기초해 지급액을 산정하는데, 소득 조사를 위한 그 몇 개월의 기간에 식료품과 주거비 등 생존의 압박이 크게 는다는 연구 보고서가 다수 존재한다. 음의 소득세를 시행하면 그 고통의 기간이 1년이 될 수도 있다.

기본소득이 음의 소득세보다 예산이 훨씬 많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다. 이들은 음의 소득세가 규모 대비 효율이 더 높다는 주장을 펴지만 완전히 그릇된 주장이다. 이런 생각을 ‘재정 환상’이라고 하는데, 앞서 활용한 두 안을 통해 이 환상을 깨 보자. 음의 소득세가 더 효율적이라는 주장은 다음과 같은 맥락이다. 1안에서는 1000만 원을 일곱 명에게 지급해야 하니까 7000만 원의 예산이 필요한데, 2안에서는 1000만 원, 800만 원, 600만 원을 지급해야 하니까 2400만 원의 예산이면 된다는 것이다. 거의 삼 분의 일의 예산으로 동일한 효과를 얻을 수 있으니 음의 소득세가 더 좋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주장은 어느 지점에서 잘못되었을까?

정답은 기본소득의 7000만 원은 ‘총액’ 개념이고 음의 소득세의 2400만 원은 ‘순액’ 개념이라는 점이다. 다른 개념의 수치를 가지고 전자가 후자보다 많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1안의 기본소득을 ‘총액’ 개념으로 말하면 일곱 명에게서 총 7000만 원의 소득세를 거둬 각자에게 1000만 원씩 나눠주는 제도다. 하지만 ‘순액’ 개념으로 말하면 표의 오른쪽 세 명에게서 2400만 원을 거둬 왼쪽의 세 명에게 이전하는 제도가 된다. 즉, 지급액이 같을 경우 순액 개념으로 따졌을 때 기본소득과 음의 소득세는 똑같은 액수의 예산이 소요되는 제도다.

앞서 대한민국 모든 국민에게 월 25만 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하려면 160조가 필요하고 그것은 한국의 국민부담률을 OECD 평균 수준까지만 끌어올리면 가능하다고 논한 바 있다. 이 160조가 부담스럽게 느껴졌던 이유는 이것이 ‘총액’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25만 원에 12개월을 곱하고 거기에 5000만 명을 곱한 것이다. 결국 연간 160조가 소요되는 기본소득 안을 위해 필요한 ‘순액’은, 설계에 따라 정확한 액수는 달라지겠지만 160조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기본소득에 천문학적 예산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환상’이다.

 

평등과 공정, 소득 재분배

평등과 공평 ⓒInteraction Institute for Social Change Artist: Angus Maguire
위 그림은 공정 담론에 있어 매우 유명한 그림이다. 2020년과 2021년에 여러 정치인들이 기본소득을 비판할 때 거듭 등장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2012년에 처음 만들어진 이 그림은 이후 수많은 변형 그림으로 이어져 왔는데, 이 그림은 2016년 버전이다. 왼쪽에는 평등(equality), 오른쪽에는 공평 혹은 공정(equity)이라고 쓰여있다. 요컨대 기본소득은 왼쪽의 것으로서 ‘기계적 평등’을 추구하기에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왼쪽에서 키가 가장 작은 경제적 약자는 여전히 야구를 볼 수 없는 반면, 오른쪽은 약자에게 더 높은 밑받침을 세워주기에 함께 야구를 볼 수 있다. 오른쪽 제도를 주장하는 사람은 주로 기본소득 비판자이며, 그들은 ‘전 국민 고용 보험(박원순)’이나 ‘안심소득(오세훈)’, 선별에 기초한 각종 복지 제도를 정책으로 내세운다.

다만 여기엔 기본소득에 대한 중대한 오해가 있다. 그림만으로도 너무나 불공정하게 느껴지는 왼쪽의 그림을 잘 보면 밑받침의 크기가 모두 같다. 다종다양한 기본소득 비판자들은 기본소득의 지급액이 같으니 밑받침의 크기도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기본소득 제도에서 내는 것과 받는 것을 통일적으로 사고하지 않고 오직 받는 액수의 동일성만을 생각할 때 이런 오류에 빠진다. 기본소득은 사실 이 그림의 왼쪽에도 오른쪽에도 해당하지 않지만, 굳이 어느 것이 더 비슷하냐고 묻는다면 기본소득은 오른쪽에 가깝다. 경제적 약자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기본소득을 지급한다고 경제적 강자와 키가 같아진다고 볼 수 없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오른쪽 그림도 정확하지는 않다.
위의 과정형 그림은 기본소득 이전과 이후의 변화를 더 정확히 보여 준다. 심각한 소득 불평등이 존재하는 ①에서, 능력에 따라 차등적으로 내게 하고(②) 그것을 재원으로(③) 균등 지급하게 되면(④), 소득 불평등이 완화된다(⑤). 동등한 지급은 절대 ‘기계적 평등’이 아니라 강력한 소득 재분배 정책이라는 것을 이해하기에 좋은 그림이다. 물론 현실의 불평등은 이보다 훨씬 커서 그림 안에 그려 넣을 수가 없다.

다만 이는 다음과 같은 의문에 직면한다. ‘그래 기본소득도 소득 재분배 기능이 있다는 것은 인정해. 그래도 어려운 사람에게 더 후하게 지급하면 더 강력한 소득 재분배가 되지 않겠어? 똑같이 100이라는 재원이 있을 때 100명에게 1씩 나누어주면 어려운 사람에게 1이 돌아가지만, 어려운 사람만 20명을 선별해서 지급하면 사람별로 5씩 돌아갈 수 있잖아. 이게 더 정의로운 것이지.’ 여기서는 사회 복지 제도가 주는 선별과 굴욕의 문제를 논외로 하고 소득 재분배의 효과와 실효성에 대해서만 생각해보자. 이 주장이 간과하는 것은 무엇인가? 선별은 항상 기준의 부정확성이 문제가 되지만, 이 경우는 20명의 선별이 정확히 취약층만을 선별했다고 가정하고 논의해보자.

우선 전제 자체에 문제가 있다. “똑같이 100이라는 재원이 있을 때”라는 전제가 성립하기 어렵다. 왜 그런가? 사회 구성원 100명 전체에게 1씩 분배하는 기본소득은 설계에 따라 수치의 차이는 있겠지만 80~90명 사이의 사람들이 ‘순수혜자’가 된다. 내는 것보다 받는 것이 많으므로, 이들이 ‘내는 것’에 대한 저항감을 갖지 않게 된다. 그에 반해 100명 중 하위 20명만 수혜자가 되는 제도는 사회 구성원 절대다수의 반대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20명 바로 위에 있는 51~80위 사이의 소득자는 반발이 유독 클 것이다.

기획재정부가 처음에 1차 긴급재난지원금을 하위 70퍼센트에게만 주려고 했을 때 거기서 제외되는 30퍼센트 다수가 “세금 걷어갈 때는 우리한테 꼬박꼬박 더 걷어가다가 혜택 대상에서 우리를 제외해?”라고 하면서 반발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최소한 80명의 순수혜자가 생기는 앞의 제도였다면 기꺼이 ‘기여금’을 냈을 21~80위의 사람들이 증세에 저항하게 된다. 그 결과 후자의 제도는 100이란 돈을 모으지 못하게 된다. 가령 후자의 제도에 대해서 다수가 반발하여 18이란 재원밖에 못 모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게 되면 20명만을 정확히 선별하여 지급한다 하더라도 각각에게 지급될 자기 몫은 0.9가 되어 아까의 경우보다 취약층에게 전달되는 금액이 줄어들게 된다.

이건 스스로 만든 무리한 가정이 아니라 스웨덴의 학자 월터 코르피(Walter Korpi)와 요아킴 팔메(Joakim Palme)가 쓴 〈재분배의 역설[1]〉에서 경험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다. 요컨대 저소득층만을 선별하여 복지 수혜에 집중하는 나라일수록 중산층은 말할 것도 없고 애초에 혜택을 주려고 했던 저소득층의 재분배액도 오히려 줄어든다는 것이다. 저소득층을 타깃으로 한 정책이 저소득층에 더 불리하니 이를 역설(paradox)이라 할 만하다. 이론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저소득층 재분배액 = 저소득층 집중도 × 복지 규모

이 식에 따르면 저소득층 재분배액을 높이기 위해서는 복지 규모도 키우고 저소득층 집중도도 높여야 한다. 여기서 ‘저소득층 집중도’는 혜택이 얼마나 집중되는지에 대한 수치다. 이를 높일수록 복지 제도의 수혜자 비율이 줄어드는데, 문제는 그럴수록 중산층의 반발이 커져서 ‘복지 규모’는 오히려 작아진다.

복지 규모의 감소는 결국 ‘저소득층 재분배액’의 절대치 감소로 이어진다. 따라서 복지 규모를 고정해 놓고(위의 예에서 ‘100’) 어려운 사람만 선별해서 지급하는 것이 보편적 복지보다 어려운 사람에게 좋다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선별로 인한 복지 규모의 변동 가능성 때문이다. 코르피와 팔메의 주장은 보편적 복지 일반의 긍정성을 설명하는 것으로 기본소득을 특정해서 말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특정 계층을 겨냥하는 복지 제도가 그 계층에게 무조건 좋다는 관념에 대한 훌륭한 반박이 된다.

결국 고부담-고복지 사회로 나아가는 길은 다수 부담자와 소수 수혜자로 나뉘는 설계로는 불가능하며 다수의 사회 구성원이 수혜자가 되는 ‘다수의 연대’가 필수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윤형중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정책 위원은 “기본소득은 중산층과 취약 계층을 같은 배에 태우는 아이디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중산층과 어려운 사람을 같은 이해관계를 가진 운명 공동체로 만들어야 증세와 소득 재분배에 대한 극소수 부유층의 저항을 이겨낼 수 있다는 의미에서 한 말일 것이다. 중산층을 순부담자로, 취약 계층을 순수혜자로 만들어 중산층과 취약 계층을 반목시키는 정책은 중산층을 초부유층의 동맹자로 만든다. 복지 국가로 가는 길에서 좌초하는 행위다.

어려운 사람에게 더 혜택을 주기 위해 기본소득을 반대한다는 논리가 2011년에 있던 서울시 무상 급식 논쟁을 떠올리게 하는 이유는 무상 급식 반대에 사용되었던 인도주의(humanism) 어법이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약자의 편에 서겠다던 언론 중 일부가 평소엔 서민에 별로 관심이 없던 곳이라는 점도 여전하다.

“중산층이나 부유층 자녀에게 공짜 점심을 제공할 돈으로 서민층 자녀의 장학금을 늘리는 것이 훨씬 실속 있는 서민 정책일 것” -2010.3.14. 《동아일보》 사설
 
“여유 있는 집 아이들에게까지 무상으로 급식하는 것은 예산 낭비” -2010.2.14. 《조선일보》 사설
 
“기본소득은 부유층, 가난한 계층 모두 같은 액수를 지급하자는 것 ...... 소득이 적은 이들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도록 해야 정의 실현 아닌가?” -2020.6.11. 오세훈 당시 전 서울시장

2011년에 무상 급식을 반대해서 서울시장직을 사퇴했던 오세훈은 동일한 논리로 기본소득을 반대하며 ‘안심소득’을 제창했고 지금은 다시 서울시장직을 맡고 있다. 어려운 사람은 자신들만 도드라져 보이기를 원치 않고, 모두가 같이 혜택을 누리는 것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이해할 수 있을까? 모두를 위한 무상 급식, 모두를 위한 기본소득은 그들의 주장대로 ‘서민’을 위해 하는 것이다. 보편적 무상 급식이 삼성전자 부회장의 자녀를 위한 것이 아니었듯이 보편적 기본소득도 재벌을 위한 것이 아니다.
[1]
Korpi. W. & Palme. J., 〈The Paradox of Redistribution and Strategies of Equality: Welfare State Institutions, Inequality, and Poverty in the Western Countries〉, 《American Sociological Review》, 63(5), 1998., pp. 661–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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