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공공의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혹은 내가 해야 할 영역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하는 일이 나뿐만 아니라 이웃과 사회를 위한 것이 된다면, 이는 구성원이 집단의 문제를 해결하는 진정한 의미의 공공디자인이다. 특히 지역 문제에 대한 개인의 자발적인 참여는 선진국의 표증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시민이 삶의 문제를 발견하고 주도적으로 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공공디자인의 ‘시민 침술’에 해당한다.
당사자의 힘
이민호 씨는 ‘화살표 청년’이라 불린다. 2011년 11월, 당시 23살이던 그는 우연히 버스 정류장 노선도에 방향 표시가 없는 것에 의문을 가졌다. 노선도엔 해당 정류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가야 할 방향은 고려하지 않은 채 정류장 이름만 줄줄이 나열되어 있었다. 방향 표시가 없으니 버스를 반대편 방향으로 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말한다. “제가 ‘방향치’예요. 어렸을 때부터 버스를 역방향으로 탄 적이 많아 항상 노선도를 유심히 보곤 했어요. 그러다 보니 방향 표시가 없는 노선도가 눈에 많이 띄더군요.”
[1] 그는 직접 작은 빨간색 화살표 스티커를 사서 서울권 버스 정류장을 틈틈이 돌며 노선도에 스티커를 붙이기 시작했다. “스티커 한 장에 화살표 표시가 455개가 들어 있는데, 일곱 장에 800원이에요. 800원으로 서울 시민 1000만 명이 편리해진다니⋯ 참 괜찮지 않나요?” 이민호 씨가 붙여 놓은 화살표 스티커 덕에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도 버스 방향을 파악할 수 있었고, 이후 서울시가 노선도 디자인을 개선하는 계기가 됐다.
[2]
한 명의 시민이 도시민 전체의 삶에 변화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마을 전체가 힘을 모아 새로운 지역 사회를 만들기도 한다. 최근 리빙랩(Living Lab)이라는 이름으로 지역 주민들이 다양한 지역 문제를 풀어 나가는 프로젝트들이 많아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유럽리빙랩네트워크(ENoLL·European Network of Living Lab)는 유럽을 중심으로 400개가 넘는 공식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각 지역 사회의 문제를 홈페이지에 올려 함께 문제를 해결할 사람을 모으고, 다양한 분야에서 투자를 받는다. 리빙랩의 가장 큰 장점은 마을 사람들이 직접 참여하기 때문에 문제에 대한 이해도와 공감대가 매우 높다는 것이다. 이를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거버넌스 시민 침술’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예를 찾을 수 있다. 1960년대 강원도 정선은 석탄 수요로 최대 부흥기를 맞았다. 석탄을 캐기 위해 다양한 기업이 들어왔고, 일자리를 찾아 광부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대체 에너지·재생 에너지에 대한 논의가 증가하며 석탄 산업은 하향세에 접어들었고, 광산 주변 마을엔 사람이 살지 않는 공가가 늘었다. 거리는 관리되지 않고 쓰레기로 넘쳐나 음습한 모습이 되어 갔다.
이후 이곳 주변에 강원랜드가 들어선다는 소식이 퍼지며 마을 사람들은 활력이 생길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수익금의 일부로 조성한 개발 기금은 도로 개선 등에 투자될 뿐 마을 주민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혜택은 없었다. 김진용 마을호텔18번가 협동조합 상임 이사는 말한다. “주민들은 황당해했고, 결국 ‘우리가 해야 되는구나, 우리가 나서지 않으면 동네가 바뀌지 않는구나’를 느꼈다. 주민이 직접 마을을 살려야겠다는 고민을 시작하며 도시 재생을 모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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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한마을 주민들은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지저분한 도로와 골목길을 청소하자 거리가 조금씩 밝아졌고, 주민들의 인식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자진해서 자기 집 앞을 청소하고, 직접 가꾼 꽃 화분으로 단장했다. 폐허가 되어가던 고한 18리 산골 마을에서, 주민의 참여로 불과 1~2년 새 탄생한 예쁜 호텔이 바로 지금의
마을호텔18번가다.
마을호텔18번가는 골목 상점들을 하나로 모아 호텔처럼 운영한다. 민박집은 호텔의 객실이 되고, 중국집은 호텔의 식당, 마을 회관은 작은 컨벤션 센터가 됐다. 수직으로 높은 호텔이 아니라 일명 ‘누워 있는’ 호텔이다. 높다란 건축물을 새로 짓거나 없던 가게를 창업한 것이 아니라, 마을에서 영업 중이던 상점들을 모아 여러 서비스를 편리하게 즐길 수 있는 호텔을 만든 것이다. 고한마을은 소규모 재생 사업에 선발되어 2018년 빈집 열 채를 단장할 수 있었다. 이듬해엔 노후 주택 열 채를 리모델링했고 꾸준히 단장한 결과 지금까지 30여 채가 새롭게 바뀌었다. 상가에 생기가 돌며 새로운 상점도 들어왔다. 사업 초기에는 주민들 간의 갈등과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결국은 합심해 마을을 개선했다.
마을 전체를 호텔처럼 만들기 위해 주민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호텔의 로비 역할을 담당하는 골목길을 꾸미고 단장하는 것이었다. 지역의 특산품인 야생화를 이용해 ‘고한 골목길 정원박람회’를 개최했다. 가드닝부터 사진전, 화분 만들기 체험, 돗자리 영화관, 야생화 음악회 등 프로그램 기획부터 실제 전시 및 행사 진행까지 모든 과정을 주민이 이끌었다.
지원만이 마을 개발의 답은 아니다. 마을호텔18번가는 주민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할 때 비로소 지속 가능한 마을 개발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줬다. 기업이나 지역 행정이 중심이 될 경우 개발 사업은 지원이 끊기는 순간 그 수명을 다하지만, 해당 지역을 잘 이해하고 애정이 있는 주민이 참여할 경우 다양한 사업과 커뮤니티를 창출하고 이어나갈 동력이 커진다.
솔루션을 디자인하다
공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민의 관심이다. 공공디자인의 실제 수혜자가 바로 시민이기 때문이다. 시민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 다양한 곳에 숨어 있던 문제를 발견하고, 만족도 높은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디자인’의 정의를 눈에 보이는 결과물로 한정해서 생각하지만, 공공디자인은 공공의 정책과 서비스를 만드는 기획, 의논, 합의 등 과정 전반에 디자인을 적용해 개인의 삶과 사회 문화적 가치를 향상시키는 움직임을 일컫는다. 즉, 각종 유무형의 정책과 서비스 등도 공공의 이익을 도모한다면 공공디자인에 해당한다.
지난 2014년 출범한 행정안전부 산하 국민디자인단은 정책과 공공 서비스를 디자인할 때 국민의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의제 설정, 정책 결정과 집행, 평가와 피드백 등 정책 과정 전반에 공무원, 국민, 그리고 서비스 디자이너가 함께 참여한다. 디자인적 사고(design thinking)의 방법론으로 공공 서비스를 개발하고 개선하고 있다.
[4] 2020년까지 국민 정책 디자인을 통해 추진된 과제는 누적 1491개에 이른다.
광주 광산구 건강 약자 병원 동행 ‘휴블런스’도 이러한 국민디자인단의 손에서 탄생했다. 휴블런스는 휴먼(human)과 앰뷸런스(ambulance)의 합성어로 노인, 만성질환자, 아동 등 지속적으로 병원 진료가 필요하지만 가족의 돌봄이 부족한 시민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공공 병원 동행 서비스다. 간호 전문 경력을 가진 동행 매니저가 시민의 집을 찾아가 병원 이동부터 접수, 진료, 검사, 약국 처방, 귀가까지 모든 과정을 함께하면서 필요한 치료를 제때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한다.
[5] 또 경력 단절 인력을 동행 매니저로 양성하고 서비스에 투입함으로써 지역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한다. 1인 가구가 증가하고 초고령화 시대에 접어들며 돌봄을 책임질 가족이 없거나, 가족이 있어도 병원 동행이 어려운 건강 약자를 위한 복지 안전망이 시민 침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한국도로공사 또한 “국민이 바라는 대로(大路)”라는 모토로 고객디자인단을 운영하며 국민의 아이디어를 고속도로 디자인 정책에 반영하고 있다. 매년 약 6개월간 지원자의 전문성과 연령, 주거 지역 등을 고려해 고속도로 공공디자인에 관심 있는 국민을 선발하고 있다. 이렇게 위촉된 고객디자인단은 현장 조사와 워크숍 등을 거쳐 아이디어를 발굴하고, 고속도로에 반영할 수 있는 솔루션을 제안한다. 한국도로공사는 여기서 나온 아이디어 중 우수한 아이디어를 선별해 실제 고속도로 공공디자인에 적용한다.
그렇게 2016년 1월, 용인시 수지구 환승 정류장이 탄생했다. 기존 용인시 주민들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 우선 서울로 진입했다가 다른 고속버스나 관광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비효율적인 동선과 주민의 불편을 해결하고자, 경부고속도로의 한 지점에 고속도로-대중교통를 연계하는 환승 시설을 만들었다. 이름은 ‘EX-허브’로, 고속도로(expressway)와 교통의 중심인 허브(hub)의 합성어다. 고속도로에서 바로 동천역을 통해 지하철 신분당선을 이용하거나 시내버스 또는 시외버스를 갈아탈 수 있게 됐다. 그뿐 아니라 나들목까지 가지 않아도 통학·통근용 셔틀버스를 탈 수 있게 됐다.
[6] 한국도로공사는 이러한 EX-허브를 비롯해 국민 참여형 디자인 정책을 수행한 공로로 2022년 대한민국 공공디자인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이 공공디자인의 가장 큰 수혜자는 고속도로와 인접한 생활권 내 주민들이다. 불필요하게 시간을 소모하고 공간을 이동하던 환승 여정의 간소화를 통해 시민들의 이동 편이를 극대화했다. 현재 EX-허브는 전국 대표 고속도로를 중심으로 빠르게 건설되고 있다. 수도권 제1순환도로에 가천대 정류장, 시흥 하늘휴게소 정류장이 들어섰으며 경부고속도로에는 동천·죽전 정류장과 옥천나들목 정류장, 남해고속도로엔 섬진강휴게소 정류장이 있다. 이외에도 EX-허브는 영동고속도로,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경인고속도로 등에도 설치 예정이다.
아이들이 바라본 도시
1989년 제정된 유엔아동권리협약(CRC·Convention on the Rights of the Child)
[7]은 2조 ‘아동의 차별받지 않을 권리’에서 성별, 인종, 피부색, 언어, 종교, 경제력, 신체 조건 등에 상관없이 모든 아동이 동등한 권리를 누려야 함을 다룬다. 아동 복지 전문 기관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은 지난 2019년 유엔아동권리협약 채택 30주년을 맞이하여, 지역 사회 곳곳에 있는 아동 차별적인 요소를 점검하고 개선하고자 ‘별의별 차별이야기’ 캠페인을 진행했다. 전국 354명의 아이들로 구성된 ‘별의별 탐험대’는 그해 9월부터 두 달간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 사회 곳곳을 자신의 눈으로 살폈다. 관공서, 대중교통, 상업 시설, 놀이 시설, 교육 기관 등 165곳을 탐험하며 공공시설들에서 보이는 차별 요소들을 점검하고 사진으로 기록했다. 어린이들이 찾아낸 ‘별의별 차별이야기’다.
어른들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세상은 아이들에게 버거울 때가 많다. 공중화장실이나 대중교통, 여가·놀이·문화 공간, 학교 등은 어린이들이 가장 많은 불편을 느끼는 공공장소였다. 특히 화장실에선 까치발을 해도 가방걸이와 옷걸이는 너무 높았고, 외투를 손에 들고 볼일을 보는 경우가 잦았다.
[8] 또 지하철 게이트의 차단봉은 너무 높고, 에스컬레이터의 손잡이는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다. 마트에서 어린이 물품 코너에 가도 높이 진열된 탓에 원하는 물건을 꺼내기 어렵다. 이처럼 어른을 기준으로 한 시설들은 어린이에겐 위험과 차별이 서린 시설이다.
이에, 별의별 탐험대는 전국 아동이 불편을 느끼는 시설들을 찍은 사진을 모아 〈낮은 사진전〉을 개최했다. “우리나라에는 어른들만 살고 있는 게 아니에요. 아동들도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 주세요. 조금 더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바라봐 주세요.”
[9] 이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어른 중심으로 구성돼 있는지, 그 때문에 어린이들이 얼마나 큰 불편을 겪는지를 알리는 계기가 됐다. 아동들이 도시의 디자인에 직접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그들 또한 우리 사회의 중요한 구성원이라는 점을 일깨워 준 시민 침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