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리즘 자본주의
2화

플랫폼과 알고리즘의 신경망 ; 예속된 인지의 자동화

새로운 자본주의 체스판, 플랫폼의 등장


체스 게임에서 가장 당혹스러운 순간 중 하나는 아마도 ‘스테일메이트’일 것이다. 킹이 공격받고 있지 않지만 어떻게 움직여도 스스로 체크 상태가 되는 경우, 스테일메이트가 성립하면서 게임은 무승부로 끝난다. 21세기 이후 자본주의는 이런 판국의 연속이다. 자본도 노동도 어느 방향으로도 움직일 수 없고, 어떻게도 승부를 낼 수 없는 교착 상태. 두 가지 경우의 수가 가능한데, 노동 진영이 체스판을 뒤집어엎거나, 자본 진영이 체스의 룰을 마음대로 바꿔 버리거나다. 모두 체스판 바깥에서만 가능한 일들이다.

최근 우리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은 후자에 해당한다. 산업 혁명 이후 오랜 기간 지속돼 왔던 임금 노동 중심의 경제가 종언을 고하고 있다. 임금은 비대칭 체스 게임을 지배해 온 룰이었다. 자본가는 사회적 생산 수단을 독점, 임금을 주고 노동력을 구매해 상품을 만든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해 삶을 영위한다. 임금은 자본과 노동을 매개하고, 노동력을 상품으로 만든다. 물론 자본가들과 달리 노동자들에게는 노동력을 판매하지 않을 자유 따윈 없다. 임금이 없다면 물적 삶이 상품 형식으로만 교환되는 현실에서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자본주의 체스 게임이 유지되어 온 비결이었다.

그런데 이 구조가 바뀌기 시작했다. 임금을 주지 않으면서도 노동을 하도록 할 수 있는 새로운 체스판, ‘플랫폼’이 도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체스판은 겉보기엔 이전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그 안쪽에는 교묘히 열과 행마를 바꾸는 기계 장치들이 설치되어 있다. 알고리즘이 바로 그것이다. 알고리즘이 작동하면, 노동 진영의 수는 매번 자충수가 돼버리고 만다. 이를 눈치챌 길이 만무한 사람들은 몰래 룰을 바꿔 버린 자본가들에게 항의하는 것이 아니라 체스 공부를 덜 한 자신, 결정적인 순간에 잘못된 선택을 한 자신을 자책한다. 체스는 이제 자본이 노동을 수탈하는 일방적인 게임이 되어 가고, 룰은 이해하기 어려워질 정도로 복잡해졌다. 자본주의 게임의 법칙을 보이지 않게 바꾸려면 인간의 인지와 커뮤니케이션 자체를 재구성해야 한다. 손으로 패를 숨기거나 말을 몰래 움직이는 등의 기만은 물리적인 층위다. 이런 일들은 자본주의 태동 이후 지금까지 항상 벌어져 왔지만, 사람들은 이를 알아채고 적극적으로 투쟁해 왔다. 그러나 체스판이 스스로 움직이게 하려면 인지적 층위에서 물밑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 이를 간파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자동화 정보 기술이 인간 인지·커뮤니케이션 영역에 본격적으로 퍼지면서 새로운 자본주의 축적이 전개되고 있다. 오늘날 기술 혁신은 진화된 알고리즘에 의한 인지 자동화를 축으로 삼아 움직인다. 이는 퍼스널 컴퓨터와 상용 인터넷 이후 30년간 심화돼, 특히 2020년대 이후부터는 웹 3.0의 대가속으로 물면에 드러났다. 긴 시간 동안 월드와이드웹에 축적된 빅데이터와 이를 활용한 인공신경망의 발달, 정치·사회·문화의 방대한 영역에 걸쳐진 소셜 미디어 기반 커뮤니케이션, 자연어와 완벽하게 상호 작용하는 거대 생성 인공지능의 대두, 탈중앙화 금융 경제를 구축하고자 하는 블록체인의 등장이 대표적인 예다. 이 가운데 신기술 개발과 상용화를 독점하는 실리콘밸리 빅테크들, 구글·아마존·애플·마이크로소프트·메타(페이스북), 한국의 네이버와 다음카카오 등이 대약진을 이뤘다. 빅테크는 자신들만의 네트워크와 정보 기술 생태계를 조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이윤 추구 메커니즘을 도입해 나갔다. 물질재 상품과 중앙집중화된 육체노동이 중심이 되는 원자(atom)의 경제로부터, 정보·지식·데이터·컴퓨팅 리소스 등 비형체적인 가치 및 이를 생산하는 문화적 및 지적 노동이 중심이 되는 비트(bit)의 경제로의 전환은 자본주의 작동 프레임을 크게 변환시켰다. 사회학자인 네그로폰테(Negroponte)에 따르면, 기존의 물질적 생산·산업 자본주의는 거대한 중앙 연산 장치인 ‘메인프레임’ 모델에서 탈피해 ‘퍼스널 컴퓨터’ 모델의 탈중심적 네트워크 경제가 오늘날 사회적 삶의 핵심을 이루게 된다.[1] 디지털 비트 경제로의 전환에서 중요한 것은 컴퓨터가 아닌 ‘컴퓨팅’이다. 컴퓨팅은 정보 기술 혁신이 집적되는 기술 체계이자 하나의 환경으로서, 컴퓨터와 연결된 모든 사고와 감각, 그리고 생활 세계를 거대한 시장 경제의 요소로 환원시킨다. 이처럼 널리 퍼진 컴퓨팅은 상품 및 서비스의 생산에 의한 가치를 증대할 뿐 아니라 경영, 조정, 생산에 이르는 수준에서 절차와 방법을 끝없이 혁신·유지하면서 지식 경제를 공고화한다. 지식과 정보는 이제 새로운 원료다. 그것을 가공하고 변환하는 인간 두뇌 활동은 영구히 갱신되어야 하는데 그 사이의 무수한 점들을 선분으로 연결하는 것이 컴퓨팅이다. 컴퓨팅은 기술일 뿐 아니라, 경제의 제도적 안배와 교육과 문화에서 더 심층적인 변화를 이끄는 관행, 내면화된 태도 자체를 생산한다.[2]

 

플랫폼과 알고리즘, 소통을 정량화하다


그러나 컴퓨팅적 전환에서 진정으로 혁신적인 부분은 재화나 가치의 패러다임 전환(물질 → 지식·정보)이 아니다. 그것들을 실질적으로 생성하는 노동의 형태가 변화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퍼스널 컴퓨터와 인터넷이 삶에서 보편화하면서, 컴퓨터의 작동 방식에 따라 상징과 정보가 가치화되고 처리되는 ‘비물질노동(immaterial labour)’이 도래한다. 대규모 자동차 공장과 노동조합의 시대가 저물고 인간 지력이 직접 컴퓨터·정보 기계와 피드백을 주고받는 시대가 왔다. 정치 철학자 네그리와 하트(Negri & Hardt)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는 점점 더 컴퓨터처럼 생각하고 있다. 커뮤니케이션 기술과 상호 작용의 컴퓨터 작동 모델이 노동 활동에서 중심이 되는, ‘컴퓨터 및 커뮤니케이션에 의한 생산 혁명’이 일어나면서, 노동과정은 정보 커뮤니케이션 기술로 모듈화된다.[3] 서비스, 문화 상품, 지식, 커뮤니케이션과 같은 비물질적 재화를 생산하는 비물질노동이 주가 되면서, 잉여가치 생산에서 대량 생산 공장의 노동력이 이전에 차지했던 역할이 점점 지적이고 비물질적인 소통적 노동력에 의해 채워지게 된다는 것이다.[4] 실제로 2010년 이후 소셜 미디어 플랫폼을 중심으로 한 웹 2.0이 형성되면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구체화되는 중에 있다. 우리는 소셜 미디어와 플랫폼에서 광고를 보고, 상품을 소비하며, 네트워크 속에서 생각하고 소통한다. 인터넷 강의를 듣고, 유튜브에서 정보를 얻으며, 구독·좋아요·팔로우 등으로 수많은 사람과 신호를 주고받는다. 빅테크와 그들이 운영하는 플랫폼들은 이것들을 상품화하면서 정보 자본주의 경제의 규모를 키웠다.

소통·상징적 상호 작용에 의한 문화적 가치의 생산은 이전에는 노동이 아니던 활동들을 노동으로 소구시킨다. 오늘날 ‘소통적’인 형태로 전화한 자본의 힘은 커뮤니케이션 기술로 매개된 메시지를 사용 가치에서 교환 가치로 변환시키며, 비물질적 가치의 생산을 넘어서 모든 종류의 사회적 네트워크와 협업 체계에 자본-노동의 비등가적 힘 관계를 확산한다.[5] 우리가 메신저와 채팅방, 영상 채널, 소셜 미디어 피드에서 주고받는 모든 신호는 일종의 수학적 영향력으로 환산되는데, 알고리즘은 이를 정량 평가하여 위계화하는 역할을 한다. 1만 유튜버, 10만 유튜버, 100만 팔로워, 조회 수 10만 회의 영상, 댓글 3000건이 달린 포스팅 등. 빅테크가 체스판 밑에 깔아 둔 알고리즘은 이처럼 인간 커뮤니케이션을 수평적· 민주적 참여로 이끄는 것이 아닌 ‘기여(contribution)’의 정도에 따라 더 많은 정보와 가치가 주어지는 방향으로 행마를 유도한다.

대표적인 예가 구글의 페이지랭크 검색 알고리즘, 이용자의 관심을 키워드와 해시태그 단위로 분류해 연관성 중심으로 노출하는 소셜 미디어 피드 알고리즘이다. 이들 알고리즘은 모든 데이터의 가치를 평가하는 주요한 행위자로서 공장의 산업 기계들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알고리즘은 지식과 정보를 질이 아닌 양으로 평가하고, 가중치와 연관성에 따라 사람들에게 특정한 정보를 편향되게 노출하며, 이 안에 광고를 끼워 넣어 돈을 번다. 누구와 연결될지, 어떤 상품을 소비할 것인지, 또 어떤 정보를 진실이라고 판단할지 등 인간 사고의 경로가 알고리즘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현재의 웹2.0은 1990~2000년대 중반까지의 웹 1.0과 달리 정보와 지식의 ‘공유’가 아닌 정보와 지식을 통한 ‘이윤 추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노드들의 이윤 추구 활동을 조직화하고 포획하는 자본의 가두리 양식장, 플랫폼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타나게 된다.

플랫폼은 알고리즘으로 운용되는 디지털 아키텍처로서 기술인 동시에 조직 모델 그 자체다.[6] 컴퓨터의 사이버네틱스 논리가 컴퓨팅을 만들 듯, 알고리즘은 플랫폼의 가치 축적·실현의 로직을 완성한다. 플랫폼은 우리의 마음과 사고가 응축되고 상품화되는 장이면서 그것들 간의 교환이 이뤄지는 시장이기도 하다. 플랫폼에서 펼쳐지는 일상 — 재화의 구매와 판매, 상품의 전달, 서비스, 콘텐츠, 커뮤니케이션, 담론에 이르는 모든 삶 활동 — 은 알고리즘의 작동 방식에 따라 모듈화된다. 다시 말해 플랫폼과 알고리즘은 삶의 활동을 포획해 데이터 리소스로 만들고 모듈화하는 아키텍처의 신경망이다. 우리의 모든 커뮤니케이션은 사실상 플랫폼들을 투과하며 이뤄지고 있다. 구글에서 정보를 검색하고, 페이스북에서 홍보하거나 여론을 읽으며, 인스타그램에서 자랑을 하고 최신 트렌드를 파악한다.

2000년대까지 정보의 가공과 유통, 상호 작용과 피드백은 개인 홈페이지·블로그 등 탈중심화된 웹에 의존하고 있었다. 반면 웹 2.0에서는 유튜브와 소셜 미디어를 중심으로 한 플랫폼들의 자장에 모든 것들이 집어 삼켜졌다. 구독과 좋아요는 이제 단순한 의사 표현이 아니라 뭔가를 구매하는 행위, 즉 우리의 소통과 정동을 상품의 맥락에서 표현하는 행위가 된다. 따라서 정량 평가 알고리즘을 탑재한 플랫폼-알고리즘은 메시지가 전달되는 장소가 아니라 ‘가치화’되는 장소이다. 정보를 다루고, 해석하고, 의미를 주고받는 과정이 곧 경제적 과정이다. 더 많은 구독과 좋아요는 플랫폼과 이용자들에게 광고 수익을 안겨주고, 이 데이터들이 축적되고 분석된 결과 피드와 추천, 더 많은 광고들이 연결되며, 그 결과 우리는 물질적으로나 비물질적으로나 뭔가를 더 많이 소비하게 된다.

 

인지 기계가 생산하는 문화


구글의 광고 알고리즘인 애드센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의 광고 추천 알고리즘은 수많은 웹페이지와 영상에 끼어들어 키워드 연관성 기반 광고들을 자동으로 매칭시킨다. 알고리즘 광고는 과거 광고주가 방송국이나 제작자들에게 직접 의뢰해서 삽입하는 간접 광고와 우리가 TV를 보는 도중에 시청하는 광고 시간을 자동화된 방식으로 직조했다. 알고리즘에 의한 ‘보는 것’, ‘듣는 것’의 자동화는 이제 우리의 삶 곳곳에 침투해 있다. 주체라는 것이 과연 있기는 할까? 코드와 알고리즘에 결부된 인간 활동은 더 이상 데카르트적인 개인의 생각 단위라고 부를 수 없다. 그것은 매우 정교한 계산주의적 층위에서 이뤄지며, 알고리즘은 인간 사고 및 성찰의 지형을 완전히 바꾸는 ‘문화 기계’로 영향력을 행사한다.[7]

알고리즘은 문화 창조보다 더 기저의 인간 인지 활동들, 예컨대 보고, 듣고, 느끼고, 표현하고, 감각하는 등의 행위에 개입한다. 근대의 방직기와 증기 기관이 산업 기계라면, 알고리즘은 인지 기계다. 산업 기계는 물리적 층위에서 작동하지만, 인지 기계는 물리적 세계(physical)와 디지털digital이 결합된 합성계, ‘피지털(physital)’[8]의 층위에서 움직인다. 알고리즘의 물샐틈없는 그물망은 우리에게 정보나 상징의 질적 측면들 대신 양적 측면들(시청 시간, 좋아요, 구독자, 팔로워, 조회 수)로 표시된 경제적 가치를 우선시하고, 사람들이 그것들에 이끌리도록 매혹하는 것이다. 플랫폼은 이렇게 만들어진 이용자들의 감정·정서·의식·정동·언어·활동 등 전자적 표현과 지적 유대의 무수한 관계들을 디지털 인터페이스에 효과적으로 실어 나르고 중개해,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의 망으로 흡수한다.[9]

알고리즘이라는 인지 기계의 확산은 전에 없던 문화 창조와 소통의 대량 생산을 추동했고, 자본주의의 체질을 ‘공장 사회’에서 ‘사회적 공장’으로 변모시켰다. 1960년대 이탈리아 노동주의자들의 반자본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마리오 트론티(Mario Tronti)는 포드와 피아트의 공장에 도입된 자동화 기술 혁신이 사회 전체로 퍼져나가는 것을 목격하면서 ‘사회적 공장(Social Factory)’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10] 공장 사회란 산업 공장 안에서 기계의 작동 방식에 따라 인간 노동자의 작업을 파편화하는 분업의 구조가 사회 전체의 지배 구조가 되는 것을 말한다. 19~20세기 중반까지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 한국의 경우 1950~1980년대 후반까지가 여기에 해당한다. 공장 사회는 철저한 규율과 훈육, 기계처럼 유기적이고 중앙집중화된 권력을 특징으로 한다. 반면 사회적 공장화는 자본이 시공간 압축을 통해 교통과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발달을 증폭하고, 생산에 결부된 분업이 물리적 공간을 넘어서 사회 곳곳에 분산·배치되는 과정을 뜻한다.[11] 유튜브의 콘텐츠가 기존의 방송·문화 산업 시스템이 아닌 개인의 주거 공간 안에서 제작되는 것이 좋은 사회적 공장화의 사례다. 공장의 설비와 기계가 철저히 분산돼, 그 요소들이 사회 구성원 전체의 머릿속에 퍼져 있는 상태가 곧 사회적 공장화다.

마르크스가 19세기 산업 공장의 기계와 인간 노동의 대립 속에서 자본주의의 법칙을 찾아냈듯이, 우리는 21세기 자본과 생산의 시공간, 즉 두뇌와 컴퓨터 — 인간 인지 능력과 플랫폼 — 알고리즘 신경망을 오가는 사회적 공장에서 가치 운동의 회로를 찾아내야만 한다. 사회적 공장의 컴퓨팅 인프라가 알고리즘으로 전화한 이상, 널리 퍼져 있는 이 문화 기계들을 네트워크화된 불변 자본(기계류·생산 설비·원자재)으로 파악하고 언어·정동·소통의 영역으로까지 범주를 확대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실리콘밸리 빅테크 기업들이 그러하듯, 이제는 직접적인 생산 과정 외부에서 생산되는 가치를 포획하는 장치에 대한 투자가 생산 설비·노동에 대한 투자보다 훨씬 경제성이 높아지고 있다. 상품을 직접 생산하는 기계, 노동자들의 임금 부문은 하청·하도급·OEM 등으로 외주화하고, 대신 이렇게 거둬 들여진 상품들을 판매하는 플랫폼과 알고리즘에 대한 투자로 선회하는 것이다. 아마존, 쿠팡과 같은 플랫폼들은 이 현상을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단초다. 이들은 직접 물건을 생산하거나 유통하지 않고, 대신 플랫폼을 만들어 외주화된 생산자-프리랜서 유통자들을 매개해 준 다음 수수료, 광고로 돈을 번다. 중개 수익이 주를 이룬다는 점에서 유튜브와 소셜 미디어 기업들도 ‘생산의 외부’에 대한 투자라는 메커니즘을 똑같이 공유한다. 이제 불변 자본은 언어적 기계의 총체로서 사회에 분산돼 있고, 가변 자본(인간 노동과 임금)은 재생산, 소비, 생활 방식, 개인과 집단의 상상력 같은 영역에 흩어져 있게 된다.[12]

이제 우리는 플랫폼의 체스판 밑에서 기보를 기만하는 알고리즘 장치들이 어떤 논리로 움직이는지 이해하기 시작한다. 자본의 집적 회로가 생산 과정의 외부로 옮겨갔듯이, 부 또한 임금 노동의 외부를 통해 집적된다는 점이 알고리즘 자본주의의 특징이다. 전통적인 기업가는 대량의 노동력을 고용해 상품을 생산한 다음, 그 상품을 판매해 이윤을 축적한다. 이윤이 확대 재생산되려면 상품은 반드시 판매돼 가치를 실현해야 한다. 그 때문에 경영·마케팅·관리의 노하우가 이윤의 핵심이 될 수밖에 없고, 노동의 형태는 사무직·전문가주의로 변태해 왔다. 이것이 피터 드러커와 다니엘 벨 등 주류 경제학·사회학자들이 이야기해 온 탈산업 사회의 논리다.

 

인지 자동화 : 감각적 주체의 사라짐


그러나 알고리즘 자본주의 국면에서 빅테크 기업들은 노동자들을 고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플랫폼을 만들어놓은 다음, 마치 지주들이 소작농에게서 공물을 받아내는 것처럼 수수료 수익으로 부를 쌓는다. 핵심은 임금과 노동 착취가 아닌, 외부화된 노동과 지대다. 플랫폼에서 자본-노동 관계를 연구한 닉 서르닉 (Nick Srnicek)에 따르면, 구글의 매출에서 광고가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89.9퍼센트에 달하고, 페이스북은 96.6퍼센트에 달한다.[13]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주인이 번다는 옛말과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점이 있다. 주인은 최소한 곰에게 숙식을 제공하지만, 플랫폼들은 사실상 생산의 주체나 다름없는 이용자들에게 아무런 삶의 안전장치를 제공하지 않는다.

이들 플랫폼 기업들이 돈을 더 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더 많이 생산되고 더 많이 향유되어야 한다. 문화 기계들은 바삐 돌아간다. 더 많은 이용자, 더 많은 이용자 활동, 더 많은 커뮤니케이션, 더 많은 의사 표현과 정동이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한다. 알고리즘은 네트워크에 연결된 수많은 사람을 분석하고, 적극적으로 상호 작용한다. 우리가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느끼고, 더 많이 갈구할수록 축적되는 부는 더 커지기 때문이다. 질의 장막에 있던 것들을 양의 세계로 끌어내야만 가능한 일이다. 기쁨, 슬픔, 분노, 충동, 욕망 등은 인간 유적 존재의 고유한 특징이다. 그것들을 대량으로 생산하려면 라벨을 붙여야 한다. 해시태그, 키워드, 섬네일 등이 붙이고, 소통을 구독과 팔로우로 채운 다음 알고리즘으로 자동 매칭시키는 대촉진, 다시 말해 인간 인지 부문을 자동화시키는 ‘인지 자동화(cognitive automation)’에 도달하는 것이 알고리즘 자본주의가 지향하는 바다.

인지 자동화는 원래 로봇 공학에서 사용되는 개념으로, 주로 로보틱스 프로세스 자동화에 인간의 능동적인 인지 기능을 추가해 완전체의 지능형 자동화를 추구하는 기술을 뜻한다. 플랫폼-알고리즘은, 그 모듈화된 삶들이 교차하는 가운데 수많은 사고, 판단, 기억, 상징, 탐구가 이어지는 신경망이라 할 수 있다. 플랫폼은 형식이고, 알고리즘은 내용인 동시에 기계 그 자체다. 플랫폼-알고리즘 신경망이 인프라라면, 인지 자동화는 실질적인 실천에 해당한다. 나는 플랫폼-알고리즘 신경망에 의한 인지 자동화가 컴퓨팅과 결부된 문화 창조·소비 전면에서 지대 기반의 부를 증대하는 자본의 동역학을 ‘알고리즘 자본주의’로 명명하고자 한다.

알고리즘 자본주의의 핵심적인 프로토콜은 세 가지다. 인지 자동화, 유연화, 지대 추구가 그것이다. 인지 자동화를 통해 네트워크에서 ‘인간 원료’인 데이터들을 폭발시키고, 대량으로 수집한다. 플랫폼을 통해 기존의 임금 노동 또는 예술·언어 상호 작용에 해당하는 활동들을 유연화시켜, 시장 활동으로 포섭한다. 그리하여 부는 이윤이 아닌 지대의 방식으로 쌓이게 되는데, 광고, 매칭 수수료, 구독료 등이 대표적이다. 알고리즘은 이 모든 것에 인력을 행사하면서 동시에 가치 운동과는 무관한 인간 삶의 조건들에는 은밀히 척력을 행사하는 중력장이라 할 수 있다. 인지 자동화는 개인들 간의 연대, 형제애, 믿음, 연합, 계몽이 자아내는 유적인 가치들을 철저히 배제하고자 하는 알고리즘 운동으로, 노동의 소외를 통해서 더욱 가속하는 역설적인 운동이다.

인지 자동화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부수적인 요소로 존재하던 다양한 형태의 노동, 예컨대 자영 노동, 날품팔이, 매뉴팩처 등 주로 외주나 하도급으로 이뤄지던 노동과정을 플랫폼과 알고리즘에 초과 연결해 예속시킴으로써 자본의 종심을 강화한다. 전통적인 물리적 자동화(로봇암, 어셈블리 라인, 컨베이어 벨트)는 노동과정을 탈숙련화하게 되는데 이때 작업은 단순해지고 작업자의 수는 줄어든다. 자동화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organic composition of capital)’을 높이는데, 이는 불변 자본(기계류로 된 생산 수단)의 비율을 높이고 가변 자본(살아 있는 노동자)을 줄여 상대적 잉여가치 증대를 꾀하는 동학이다.

그러나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증대(노동자 수를 줄이고 자동화 설비를 늘리는)는 일시적으로는 이윤율을 높여 주지만, 이윤율은 시간이 지나면서 빠르게 줄어든다. 역설적이게도 이윤의 핵인 잉여가치를 만드는 것이 기계가 아닌 인간 노동이기 때문이다. 생산성이 높아져 염가에 생산된다 하더라도 상품들은 판매되지 않으면 가치를 실현하지 못한다. 그런데 이 상품들을 구매할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투자(자본가가 노동자를 고용하고, 임금을 지불하는 투자)가 줄고 기계 설비·주식 등에 대한 투자가 비대해질 경우, 시간이 지나면서 해당 산업 부문은 실업과 고용 약화로 인한 과잉 생산(혹은 과소 소비)를 겪게 되고, 이는 이윤율 저하와 경기 침체로 이어지게 된다. 이는 마르크스가 《자본론》 3권에서 설명하는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이다. 무차별적인 자동화로 인한 자본의 유기적 구성 증대는 장기적으로는 탈숙련화와 더불어 이윤율 저하를 야기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이윤율 저하 경향은 역사적인 ‘자본주의의 일반 법칙’이다.

그런데 알고리즘의 확산과 인지 자동화는 이윤율 저하를 교묘한 방식으로 상쇄한다. 플랫폼-알고리즘 신경망이라는 사회적 생산의 네트워크 혹은 종획된 디지털 경작지의 전면 확대는 가변 자본 비율을 감소시키는 만큼, 그보다 훨씬 많은 주변부의 비임금 노동을 마구잡이로 끌어들인다. 오늘날 우리는 주변에서 불안정하고 외주화된 비임금 노동 분야가 너무나도 많아지고 있음을 본다. 우버, 음식 배달, 에어비앤비, 유튜브와 소셜 미디어, 쿠팡 물류 센터 등이다. 이처럼 불안정하고 일시적인 노동을 수탈해 부를 축적하는 빅테크 기업들 —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메타, 아마존, 우버, 네이버, 다음카카오, 우아한 형제들, 쿠팡 등 — 은 공통점이 있는데, 복잡하고 블랙박스화되어 있는 알고리즘을 운영하며 플랫폼에서 사람들을 일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들 빅테크는 플랫폼에 접속된 노동자들을 프리랜서나 개인 사업자 같은 용어로 현혹하면서 고용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고 농경의 리듬과 부지런함, 공장의 리듬과 근면함, 포스트 포드주의 저스트-인-타임과 근면함을 모두 합친, ‘자유롭지만 연결돼 있으면서, 자율적이지만 예속된’ 노동을 확산한다.[14]

 

알고리즘 탈숙련화 : 해체되는 문해력과 예속되는 해석


그렇다면 인지 자동화의 짝패, 인지의 탈숙련화는 어떤 방식으로 나타날까? 공장과 기계류 앞에서의 탈숙련화와는 다른, 삶 활동과 문화 전반에 걸친 충격적인 탈숙련화가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알고리즘 자본주의는 글로벌 네트워크를 통해 사회 전체 구성원들의 두뇌부터 탈숙련화를 진행한다. 구체적으로 보면 ‘문해력’으로 대표되는 주체의 해석적 능력의 저하, 그리고 알고리즘과 기계 언어의 확산으로 인해 ‘비기표적 기호계’의 ‘언어적 기호계’에 대한 지배, 인간 사고의 기계적 예속이 두드러지게 현상된다. 인간 두뇌들에 펼쳐진 축색 돌기의 신경망(언어적 기호계)은 문자와 육성으로 소통하고, 유연한 해석을 통해 세계를 파악한다. 반면 지구에 펼쳐진 광섬유의 신경망(비기표적 기호계)은 알고리즘을 통해 기계 언어(코드, 신호, 프로토콜)로 개별 노드에 명령을 내린다. 전자에서 중요한 것은 주체의 능력이지만, 후자에서 중요한 것은 기술이다. 주체는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지만, 기술을 바꾸기는 어렵다. 그것은 소통의 대상이 아니라 명령의 대상이고, 인간 언어가 아닌 기계 언어로 작동한다.

오늘날의 인터넷에는 이용자를 이윤의 사슬로 옭아매는 알고리즘으로 가득하다. 이 인지 기계들은 읽고 쓰고 해석하는 행위를 통해 세계를 분석해 온(그리고 변화시켜 온) 근대적 주체를 연산주의로 억누른다. 검색 엔진의 키워드 자동 완성, 구글의 페이지랭크 알고리즘, 소셜 미디어의 피드 알고리즘과 추천, 홍보 알고리즘, 인공지능과 거대 언어 모델 등이 그 중심에 있다. 개인의 문화적 취향과 상징체계의 이데올로기적 생산은 더 이상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언어적 발화에 기반한 ‘호명’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무수한 삶 활동이 생산하는 비정형 데이터로부터 문화적 생산과 소비의 방향이 도출되고, 이로 이뤄진 메타데이터를 독점한 빅테크 자본이 주체를 알고리즘이라는 틀에 넣어 ‘주조’하는 것이다.

니체는 우리의 삶이 환상적인 것들과 마주하는 순간들의 연속이며 실제로 그것은 환상이라고 말했는데,[15] 오늘날 구글과 유튜브,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쿠팡과 로켓 배송, 우버와 배달의민족을 가로지르는 알고리즘은 기술로 빚어낸 환상을 자아내고 있다. 알고리즘이 여기저기 끼워 넣는 맞춤형 광고, 수익에 혈안이 된 인플루언서들의 자기 과시와 온갖 상품 바이럴, 유튜브 예언자들, 가짜 뉴스와 필터 버블, 끊임없이 추천되는 비슷비슷한 영상 음악들……. 이는 비트로 만들어져 광섬유로 퍼져나가는 21세기 환등상이다.

자유로운 사고와 의식적 활동이 알고리즘의 감옥에 갇혀 버린 오늘날, 인간의 언어적 및 신체 반응은 무수한 코드 연산과 기계적 작동들로 통제된다. 무엇보다 알고리즘과 기계 언어는 ‘해석의 과정’을 소거한다. 인간의 언어는 수행성의 측면을 가지고 있지만, 기계의 언어는 실행성의 측면에서 수행성을 재구성하는 초언어적 성격을 지닌다.[16] 자연 언어는 암묵지와 지성을 발달시키지만, 기계 언어는 형식지와 논리 연산을 발달시킨다. 암묵지와 지성의 발달은 문해력(literacy)에 기반하고, 문해력은 사회 구성원들의 강력한 지적 연대와 계몽으로 집적된다. 형식지와 논리 연산은 수학적 효율성에 기반하고, 수학적 효율성은 사이버네틱스와 네트워크의 발달로 집적된다.

활자의 시대, 산업 자본주의의 시대에는 문자를 읽고 해석하며 의미들과 협상하는 문해력이 강력한 계몽과 계급투쟁의 프로그램을 생성해 냈다. 그러나 알고리즘 자본주의 시대 유튜브의 동영상 추천과 소셜 미디어의 추천 광고는 궁핍과 예속을 생성한다. 우리는 수학적 효율성으로 똘똘 뭉친 이 기계 언어들의 동학, 알고리즘에 해석하지도 저항하지도 못한다. 사진이나 문자를 읽으며 우리는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고, 기각하거나 재구성할 수 있었다. 그것은 역사의 과정이었다. 그러나 코드 명령어와 프로토콜에 대고 ‘아니야’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실행되지는 않는다. 수학적 효율성(사실상 아도르노가 말한 기술적 합리성)이 자아내는 실행성의 영토는 입력과 출력의 층위에 있으며 우리는 그것과 자연 언어로 협상할 수 없다. 인지 자동화는 사회 전체의 수학적 효율성을 증대시키면서 알고리즘 자본주의의 생산성을 강화하지만, 그로 인한 탈숙련화는 바로 문해력의 상실로 나타나게 된다. 문해력의 상실은 곧 역사의 상실로 이어진다.

기술철학자인 베르나르 스티글레르(Bernard Stiegler)는 이처럼 기술의 언어가 상징의 언어를 핍박하고 나아가 주체의 해석 능력이 현저히 저하되는 현상을 ‘상징 궁핍(Symbolic misery)’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했다.[17] 그에 따르면 미디어와 정보 기술의 진보로 부상한 기술적 인자들은 개인의 고유한 리비도적 욕망(즉 삶의 에너지)에 기반한 상징적 기반을 박탈한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집단적인 상징 궁핍은 데카르트적인 개인이 세계를 해석할 수 없으며 스스로를 사유하는 주체로 인식할 수 없는 상태, ‘가분체(dividual)’로의 탈구를 야기한다. 개인이 자신의 단독성과 경험으로 기억을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이 알고리즘의 계량적 효율성으로 관리된다. 문화 산업의 도구적 합리성으로 규격화된 물신은 알고리즘에 의한 인지 자동화를 향한다. 스마트폰, 웨어러블을 비롯한 다양한 소통 기계들이 개인적 기억들을 통제하고, 개인 단위의 리비도적 충동을 맞춤식으로 자극해 소비주의적 충동으로 변환한다. 상징 궁핍은 전무후무한 경험의 궁핍과 삶의 지혜의 박탈 과정이다. 이로 인해 일상생활은 망상적 구조의 표준과 계산에 종속되며, 숙고와 사색에 드는 쓸데없는 의사 결정 시간을 소거해 개인을 정보 입출력의 분절 단위로 파편화한다.[18]

유튜브가 자동으로 재생하는 시간 중에 무의식적으로 시청한 광고, 한 번 검색한 뒤 끈질기게 추천되는 상품 목록, 이들의 가중치를 주목 단위로 평가하는 행위성(좋아요, 댓글, 구독자, 조회 수)의 지배는 상징 궁핍이라는 탈숙련화 속에서 우리가 자본주의 동역학에 예속돼 가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알고리즘이 매개해 준 비슷한 취향의 비슷한 사람들, 맞춤형 콘텐츠, 일시적으로 유행하고 사라지는 밈과 문법 등……. 그리고 이런 행위성이 생성하는 메타데이터를 다시 알고리즘이 학습해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하는 루프.

이탈리아의 자율주의 이론가인 마우리치오 랏자라또(Maurizio Lazzarato)에 따르면, 이 루프는 기계적 예속(Machinic enslavement)의 단면을 보여 주는 전형적인 현상이다. 그는 과거 언표와 행위로 이뤄져 온 과거 소비 사회의 언어적 기호계가 더 이상 개인 수준에서 개입할 수 없는 ‘비기표적 기호계’로 이행했다고 설명한다. 컴퓨터 언어의 강력한 연산화가 이데올로기의 층위에서 투영되던 소비적 욕망을 기계와 융합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알고리즘과 같은 인지적 기계들에 의한 지배가 전면화될수록 의사소통의 생산-소비 관계를 탈구시키며,[19] 주가 지수, 통화, 기업 회계, 국가 예산, 컴퓨터 언어, 수학, 과학의 함수, 방정식 등이 토대를 이루는 비기표적 기호계를 통해 기계는 스스로 말하고, 자신을 표현하며, 인간과 다른 기계, ‘실재’ 현상과 소통하게 된다.[20] 기계적 예속이란, 자본가-노동자의 생산 관계를 재생산하는 강력한 힘인 이데올로기가 인지 기계의 실행성 속에 스며드는 과정이며 인지 자동화로 촉발된 사회적 불능, 즉 인지의 탈숙련화이다. 마르크스는 부의 창조가 노동 시간과 양보다는 작동 인자들의 강력한 효율성에 의존한다고 말했는데,[21] 이는 오늘날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알고리즘은 물질 상품의 생산뿐 아니라 개인의 문화적 표현 및 상징과 해석 능력을 해체해 이를 메타데이터로 포획하고, 주체를 예속시킨다.

컴퓨터 앞에서, 그리고 스마트폰의 초연결 속에서 우리는 과연 스스로 생각하는 것일까? 알고리즘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인지 기계에 이양하는 그 순간을 파고든다. 이제 말하기와 쓰기, 그리고 지각하기 자체가 하나의 생산 구조 안에 속해 있다. 상징 궁핍과 기계적 예속으로 대표되는 인지의 탈숙련화는, 그것 자체로 알고리즘 자본주의의 동학이 될 뿐 아니라 인간의 실존적 조건까지도 위협하기 시작한다. 마르크스는 〈기계에 대한 단상〉에서 다음과 같은 표현을 썼다. “노동은 기계적 체계의 수많은 점들에서 개별의 산 노동자들로부터의 의식적 기관으로 나타난다. 분산된 노동은 기계류의 작동 과정에 포섭돼 하나의 관절을 이루게 되는데, 이는 노동자의 사소하고 개별적인 행위에 맞서 생동하는 유기체로서 기계류에 실존하고 있다.”[22] 사람들의 사유와 인지를 분절하고, 그로 인해 만들어진 데이터를 흡수해 다시 스스로 생동하는 알고리즘은 마르크스의 단상이 실재가 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 주는 좋은 예제라 할 수 있다.
[1]
Nicolas Negroponte, 《Being Digital》. Hodder & Stoughton, 1995, pp. 5-6.
[2]
로베르토 M. 웅거(이재승譯), 《지식경제의 도래》, 다른백년, 2021, 74쪽.
[3]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윤수종譯), 《제국》, 이학사, 2001, 382쪽.
[4]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윤수종譯), 《제국》, 이학사, 2001, 62쪽.
[5]
Jodi Dean, 〈Communicative Capitalism: This is What Democracy Looks Like〉, in Joshua S. Hanan and Mark Hayward (ed), 《Communication and the Economy: History, Value and Agency》, Peter Lang, 2014, pp. 147-166.
[6]
장귀연, 〈플랫폼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 《산업관계 연구》, 31(4), 2022, 38쪽.
[7]
에드 핀(이로운譯), 《알고리즘이 욕망하는 것들》, 한빛미디어, 2019, 85쪽.
[8]
이광석, 《피지털 커먼즈》, 갈무리, 2021.
[9]
이광석, 《피지털 커먼즈》, 갈무리, 2021, 59쪽.
[10]
Mario Tronti, 《Operai e Capitale》, Einaudi, 1966.
[11]
김동원, 〈플랫폼 담론과 플랫폼 자본: 삶정치 노동의 확장〉, 《문화/과학》, 87, 2016, 75-97쪽.
[12]
크리스티안 마라찌(심성보譯), 《금융자본주의의 폭력》, 갈무리, 2013, 72쪽.
[13]
닉 서르닉(심성보譯), 《플랫폼 자본주의》, 킹콩북, 2020.
[14]
김영선, 〈플랫폼 자본주의 시대의 노동자상〉, 《도시연구》, 18, 2020, 117-146쪽.
[15]
프리드리히 니체(이상엽譯), 《유고》, 책세상, 2002, 38쪽.
[16]
Alexander Galloway, 《Protocol》, The MIT Press, 2004, p. 165.
[17]
Bernard Stiegler, 《Symbolic Misery 1》, Polity Press, 2014.
[18]
Bernard Stiegler, 《Symbolic Misery 1》, Polity Press, 2014, p. 8.
[19]
Maurizio Lazzarato, 〈Immaterial Labour〉 (Colilli and Emory trans), Paolo Virno, Michael Hardt (eds), 《Radical Thought in Italy》,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06, pp.132-147, p. 40.
[20]
마우리치오 랏자라또(심성보譯), 《기호와 기계》, 갈무리, 2017, 174쪽.
[21]
카를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2》, 그린비, 2007, 390쪽.
[22]
카를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2》, 그린비, 2007, 3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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