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한복판에서 태어난 MBTI
MBTI 를 개발한 이사벨 브릭스 마이어스(Isabel Briggs Myers)와 캐서린 쿡 브릭스(Katharine Cook Briggs) 모녀는 심리학 전공자도, 인문 학 및 사회과학의 연구방법론에 익숙한 이들도 아니었다. 둘 모두 대학 교육은 받았으나, 어머니 브릭스는 미국 미시건농업대학교에서 농업을 전공했고, 딸 마이어스는 미국 스와스모어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브릭스는 교육에 관심이 많아 마이어스가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홈스쿨링으로 가르쳤고, 이웃집 아이들의 교육에도 도움을 줬다. 이 과정에서 브릭스는 아이들이 가진 각자의 장점에 주목했다. 개인이 가진 장점을 개발해 키워낸다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기대 섞인 생각이 MBTI 개발의 시작이었다.
마이어스와 브릭스가 MBTI를 개발한 1900년대 초중반, 인류는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겪었다. 전 세계는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렸고, 미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참전한 사람들은 국가를 위한다는 미명 아래 자신만큼 소중하고 존귀한 또 다른 누군가를 살상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는 조국과 사회로 돌아와 고통 속에서 여생을 보냈다. 마이어스와 브릭스는 이 전쟁의 고통을 마주하며 근본적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 했다. 인간은 왜 인간을 죽이는가? 왜 인간은 타인을 고통스럽게 하는가?
이 질문은 인간다움과 개인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방법으로 닿았다. 전쟁 중 미국 본토에 남아 있던 대다수의 여성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브릭스는 전쟁의 실상과 참상을 다양한 뉴스를 통해 접했다. 브릭스의 관심은 진행 중인 전쟁 상황이 아니라 전쟁 이후였다. 그녀는 전쟁 이후의 미래를 고민했다. 다음 세대가 전쟁을 겪지 않게 하는 것을 넘어 어떤 가치와 삶의 목적을 갖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스스로 묻고 찾을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으로 시선을 돌린 것이다. MBTI 는 각자가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를 파악하고, 고유한 장점을 극대화시켜 ‘자기답게’ 살아가는 사회를 바랐다. 자신답게 사는 사람들이 만들어 갈 미래는 전쟁을 겪은 지금과는 다른 모습일 수 있다는 희망이 MBTI를 빚어냈다.
무의식의 질서
MBTI라는 심리검사도구는 마이어스와 브릭스가 개발했지만, MBTI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심리학자가 있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칼 구스타브 융(Carl Gustav Jung)이다. 융의 심리학은 MBTI를 개발한 두 모녀에게 MBTI의 이론적 배경을 제시했다. 융의 심리학은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학설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 융은 프로이트의 학설인 성욕중심설을 바탕으로 인간의 무의식 세계를 연구했다. 융은 초기에는 프로이트의 학설을 옹호하는 입장이었으나 프로이트의 성욕중심설에 대한 비판으로 결별했고, 후기에는 인간의 무의식 세계에 관한 탐구와 연구에 몰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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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 학설의 핵심은 그의 자서전 첫 문장에서 찾을 수 있다. “나의 생애는 무의식이 그 자신을 실현한 역사이다.” 융은 무의식 탐구에 자신의 일생을 바쳤다. 융의 심리학은 분석심리학(Analytical Psychology)이다. 분석심리학은 인간 정신의 구조를 의식과 무의식으로 구분하고, 그를 직접 체험하고 경험하여 정립하는 심리학설이다. 융의 학설은 생각하여 꾸며낸 논리적 사고의 결과도 아니고 최고의 진리임을 주장하는 신앙 고백도 아니며 실험적, 통계적 고찰의 결과도 아니다.
[2] 융은 무의식을 직접 체험하고 이론으로 구축했다.
[3] 융의 분석심리학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관찰하고 스스로의 마음의 움직임을 진지하게 살펴 간 사람의 경험을 토대로 엮은 가설이다. 융 심리학의 중심에는 마음의 구조가 있다. 융은 인간의 마음을 다양한 용어로 구조화한다. 마음은 의식(Consciousness)의 주체인 자아(Ego), 무의식(Unconsciousness), 그림자(Shadow), 외적인격(페르소나Persona), 내적인격(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 원형(Archetype), 자기(Self)로 구성되어 있다.
MBTI의 이론적 배경은 융의 심리학적 유형에 기초한다. 이 심리학적 유형은 평생을 무의식 연구에 바친 융의 심리학에서 유일하게 의식을 다루는 이론이다.
“어떻게 내가 프로이트와 그리고 아들러와 구별되는가? 우리의 견해의 차이는 무엇인가? 여기 관해서 생각하여 보니 유형과 관련한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판단을 미리부터 결정하고 제약하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의 형(Typus)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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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은 심리학적 유형론을 통해 타인과 자신을 구별할 수 있다고 밝힌다. 심리유형론은 무의식을 말하기 위한 의식심리학에 가깝다. 이런 맥락에서 심리유형론은 의식 세계의 패턴을 통해 무의식에 다다르게 하려는 이론이다.
유형이론의 본질은 수없이 다양한 사람의 행동을 질서와 일관성을 통해 분류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다. 사람들의 행동이 수없이 다양하게 보여도, 실제로 사람들의 인식과 선호는 질서가 있고 일관돼 있다. MBTI에서 말하는 인식은 정보를 수용하는 것과 관련된 것으로, 사물, 사람, 사건 또는 사상을 깨닫는 방식이다. 판단은 인식을 토대로 어떤 결론에 도달하는 방식과 관련된다. 만약 사람이 무엇인가를 인식하고 결론에 도달하는 방식의 차이가 체계적이라면, 사람의 흥미, 반응, 가치, 동기, 기술 등에 있어서 유형적인 차이가 있을 수 있다.
[5] 이것이 MBTI의 관점이다.
융은 직접 일상을 경험하고 관찰하여 사람들 각자의 인식과 판단에서 패턴을 발견했다. 마이어스와 브릭스 모녀는 이를 일상생활에 적용하고 검사 문항으로 대중화시켰다. 그렇게 MBTI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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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TI는 과학일까?
사람들은 글이나 대화 속에 과학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으면 맹신에 가까운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과학적’이라는 단어가 역설적으로 맹신을 부르는 셈이다. 학문이나 이론은 검증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A theory는 존재하지만, The theory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이론은 하나의 이론일 뿐, 불변하는 진리는 아니다. 과학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이론은 과학적 방법을 통해 검증될 수 있지만 그 자체로 진리가 될 수는 없다.
과학에 대한 맹신을 넘어 더 깊은 맥락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MBTI가 개발된 1900년대의 시대 상황, MBTI 배경 이론의 주창자인 융, 마이어스와 브릭스 모녀의 MBTI 개발 이유 등을 포괄적 맥락 속에서 바라보는 관점을 가질 때 비로소 MBTI라는 심리검사도구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과학과 MBTI 사이에는 ‘MBTI는 과학이 아니다’ 혹은 ‘MBTI는 유사과학’이라는 논지가 따라붙는다. MBTI는 ‘과학적 방법’으로 검증된 심리검사일까? 과학적 방법이란 하나의 이론을 검증하기 위해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고, 객관적, 체계적, 경험적 연구를 통해 결과를 해석하는 과정이다. 누구나 이론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론이 기존에 검증한 동일 분야의 다양한 이론들과의 연구 관련성
[7]이 없고, 경험적 연구를 통한 검증이 불가능하다면 학계는 이러한 이론을 ‘비과학적’이라고 평가한다.
‘MBTI는 과학이다’라는 표현은 ‘침대는 과학이다’라는 광고 문구에서 착안해 소셜 미디어에서 유행어처럼 만든 표현이다. 엄밀히 말하면 MBTI는 과학적 도구다. MBTI는 융의 심리유형론을 바탕으로 개발된 문항을 갖고 있으며, 다양한 연령층의 검사 대상자들의 응답을 분석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 측정 결과를 바탕으로 선호지표별, 16가지 성격유형별로 사람을 분류했다. 검사 대상자들의 응답 결과는 통계의 신뢰도와 타당도를 기준으로 분석된다. MBTI는 오랜 세월 동안 신뢰도와 타당도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 왔고, 심리검사도구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을 수준의 결괏값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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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MBTI는 왜 과학 논쟁에 끊임없이 소환될까? 두 가지 쟁점이 있다. 첫 번째는 학계 수용의 경직성이다. MBTI를 개발한 모녀가 심리학 전공자들도, 심리검사 개발을 위한 연구방법론에 익숙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학계의 수용에 어려움이 있었다. 미국교육평가원(ETS)에서 ‘MBTI Form F’를 표준화할 당시에 마이어스는 심리검사도구 개발을 위해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어야 하는 다양한 심리 측정 결괏값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수집한 표본의 수가 턱없이 부족하기도 했다. 게다가 마이어스가 심리검사도구 개발을 위한 기초 통계학이나 연구방법론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표준화 과정에서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심리검사를 개발한 사람이 심리학이나 통계학의 방법론이나 전문성이 없는 상태에서 심리검사를 개발했다고 해서 심리검사 결과의 정확성에 대해서 의문을 갖거나 개발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됐다. 마이어스는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심리학의 연구방법론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심리학과 통계학의 기초부터 공부하면서 오랜 시간 MBTI를 과학적으로 검증하고자 노력했다. 검증 과정에 오랜 시간이 걸렸거나 개발자가 심리학을 전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를 과학적이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은 MBTI가 아닌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학계의 문제다.
두 번째 쟁점은 융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다. 무의식에 대한 과학적 접근에는 다음의 두 가지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첫 번째, 무의식을 과학적으로 검증하기 위해 무의식과 관련한 다양한 경험적 자료를 확보해야 한다. 두 번째, 인간이 자신의 무의식을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전제를 충족시키는 것이 있다. 바로 꿈이다. 현재도 융 분석가들은 내담자의 꿈 분석을 통해 내담자의 내면을 탐색해 간다. 과학적 방법론에 익숙한 연구자의 입장에서 무의식과 꿈은 검증하기 어려운 대상이다. 더 나아가 검증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단정 지을 수도 있다. 따라서 융의 분석 대상 자체가 비판의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이 두 가지 쟁점은 논쟁거리임에 틀림없으나, 동시에 MBTI가 발전할 수 있게 만든 논의 주제이기도 하다. MBTI가 서 있는 위치와 활용되는 분야는 대중을 향한다. 따라서 MBTI는 끊임없이 MBTI를 향한 비판과 논쟁에 대응하고 답해야 한다. 대중들이 MBTI에 친숙함을 느끼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의 포괄적인 성격의 특징을 네 가지 코드의 조합으로 표현해 주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MBTI가 가장 많이 언급되는 곳은 소셜 미디어의 개인 PR이다. MBTI는 다양한 예능의 소재가 된다. 혈액형으로 성격유형을 파악했던 과거를 대체했고, 소개팅 상대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도구가 됐다. 때로는 궁합의 도구로 쓰이기도 한다. 누군가에게는 취업 과정에서 자기소개서에 기재해야 하는 정보가 되었고, 다양한 물건과 서비스를 판매하기 위한 마케팅의 소재가 됐다.
소셜 미디어, 예능, 소개팅, 궁합, 기업, 마케팅은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거의 한 순간도 떨어져 있을 수 없는 장소인 삶의 공간이다. MBTI는 대중의 문화가 되었고, 활용은 삶의 전반이 되었다. MBTI가 이처럼 거부감 없이 사회에서 수용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에 따라 질문 역시 달라져야 한다. MBTI를 과학의 잣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왜 MBTI가 대중의 신뢰를 받고 하나의 문화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사회 현상이 된 MBTI로 시선을 옮겨야 한다는 뜻이다.
나만의 강점, 극복을 위한 힘
삶에서 MBTI를 활용할 수 있는 하나의 포괄적 관점은 긍정심리학적 관점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를 긍정심리학적으로 바꿔 끼운다면, MBTI는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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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은 무엇을 연구하는 학문이었을까? 심리학은 오랜 시간 동안 정신질환이라는 한 가지 주제에 매진해 왔다. 큰 성과를 거둔 것도 사실이다. 병증에 대한 정확한 진단, 정신질환의 발병 과정, 유전적 특징, 생화학적 작용, 심리적 원인 등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축적했지만, 이는 인간 심리의 부정적 측면을 주로 탐색했던 시도였다. 긍정심리학은 기존 심리학의 접근 방식과 다르다. 기존의 심리학적 접근이 타인의 단점이나 약점을 고치는 방식이었다면, 긍정심리학적 접근은 개인에게 낙관적인 사고방식과 행동 방법을 가르쳐 주는 식이다. 단점과 약점은 수정하고 고쳐야 하는 부분이 맞지만, 수정과정에서 개인은 부정정서가 발현하게 된다. 그러나 낙관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방법을 익히고, 자신의 강점을 발휘하게 되면 긍정정서를 자연스럽게 발휘할 수 있게 된다. 긍정정서를 자연스럽게 발휘한 아이는 사춘기에 접어들었을 때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반으로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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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심리학은 다양한 정신적 문제를 증상적인 측면에 집중해 접근했다. 긍정심리학은 인간의 내적 특성에서 긍정적인 측면으로 관점을 전환하고 연구한다. 우울증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입원 치료를 하거나 극심한 우울 상태로 인해 일상생활이 어려운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울증을 앓는 사람이라고 해서 하루 종일 우울한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우울증 환자는 약물 치료와 상담 및 심리치료를 병행하면서 일상생활로 복귀하기 위해 희망을 갖고 하루를 버틴다. 기존 심리학은 우울증을 치료의 대상으로 보고 상담과 약물을 통해 우울 증세를 치료한다. 긍정심리학은 시선을 조금 돌려 우울한 사람이 자신을 받아들이고 버티는 힘을 밝혀내려 한다.
내·외적 병리나 일상의 크고 작은 어려움을 이겨내겠다는 마음가짐은 자동적으로 갖춰지지 않는다.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은 개인이 가진 힘에서 태어난다. 경험을 통해 얻은 노하우는 대처 방식이 될 수는 있으나 이는 개인이 가진 근본적인 힘과는 다르다. 긍정심리학은 모든 사람이 각자 자신만의 강점(VIA: Value in Action. 강점 분류체계
[11])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자신만의 독특한 강점을 찾고, 강화하면 내적인 힘 또한 강화된다. 결국 삶의 어려움이나 힘든 상황을 극복할 힘은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있다. MBTI는 긍정심리학의 관점에서 활용해야한다. MBTI는 자신이 무엇을 가장 좋아하고, 편안해 하는지를 파악하도록 하는 도구다. 이를 파악한 개인은 자신의 삶을 자기답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자신의 MBTI 성격유형을 알고, 자신의 성격유형의 특징을 삶 속에서 발휘한다면 타인과의 비교가 없어도 자신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의미 있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