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을 혁신하라
한국 저널리즘의 현실은 절망적이다. 영국 로이터 저널리즘 연구소가 세계의 디지털 저널리즘 현황을 비교 조사한 〈디지털 뉴스 리포트 2018〉에 따르면, 한국은 뉴스 신뢰도 부문에서 37개국 가운데 2년 연속 꼴찌를 기록했다. ‘대부분의 뉴스를 신뢰하고 있다’고 답한 이는 응답자의 25퍼센트뿐이었다. 25~34세 연령대의 뉴스 신뢰도는 16퍼센트에 불과했다.
‘기레기’라 손가락질 받는 기자들의 사기도 말이 아니다. 한국 언론 진흥 재단이 2017년 실시한 조사에서 언론인들 스스로 느끼는 직업에 대한 만족도는 2003년 조사가 시작된 이래로 가장 낮았다. 언론사가 아닌 다른 업종의 회사로 전직하고 싶다는 기자가 61.2퍼센트였으며, 뉴스룸 내의 사기가 저하됐다는 응답도 76.8퍼센트나 되었다. ‘언론인으로서의 비전이 없다’는 이유가 54.1퍼센트로 가장 많았다.[1]
시민들이 이유 없이 뉴스를 불신할 리 없다. 기자들이 까닭 없이 절망할 리 없다. 모두 그간 언론이 언론답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디지털 기술의 도입 이후 한국 언론은 선정적 가십을 쏟아 내고 광고주에 굴종했으며 제목 낚시질과 어뷰징을 통한 트래픽 사냥에 몰두하며 독자들을 밀어냈다. 저널리즘의 본령을 저버린 언론의 자업자득이다. 이대로 가면 저널리즘의 미래는 없다.
언론사들은 편향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혁신 프로그램을 재검토해야 한다. 디지털 저널리즘의 역사는 디지털화의 과정이 반드시 지금과 같이 저널리즘의 가치를 대가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님을 증언한다. 지금과는 다른 형태와 성격의 대안적 디지털 혁신은 충분히 가능하다. 저널리즘이 소멸의 길을 걷고 있는 현실을 앞에 두고도 산업 논리에 매몰된 혁신만 주문처럼 외는 건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격이다.
우리가 가장 먼저 혁신해야 할 대상은 바로 혁신이라는 이름의 프로젝트 자체다. 전통적 저널리즘을 원형 그대로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저널리즘의 규범적 모델이 시대를 불문하고 정당화될 수 있는 불변의 교리는 아니다. 달라진 디지털 환경에 맞춰 저널리즘이 바뀌어야 한다는 사실도 지당하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구분하는 일이다. 지금까지의 디지털 저널리즘은 언제나 지켜야 할 것을 버리고, 버려야 할 것을 지키는 선택을 해왔다. 부단히 혁신하고 있는데도 현실이 개선되지 않는 이유다. 대안적 혁신이란 이러한 전도 현상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는 기획이다.
지켜야 할 것이란 무엇일까? 물론 저널리즘의 규범과 원칙이다. 디지털 시대에 기자라는 직업의 이름과 성격은 바뀔지 몰라도, 사실을 확인하고 권력을 감시하는 역할은 변함없이 필요하다. 2016년 종이 신문 발행을 중단한 영국의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마지막 종이 신문 사설에서 “윤전기가 멈추고 잉크는 마르고 더 이상 종이 접히는 소리도 나지 않겠지만, 인디펜던트의 정신은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인디펜던트의 정신’은 곧 저널리즘의 원칙이다.
사회적 맥락이 바뀌면 저널리즘의 규범 체계도 그에 맞춰 변화해야 한다. 문제는 변화의 속도와 방향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과연 우리가 저널리즘의 규범적 모델을 버려도 좋은가? 완전히 새로운 규범적 모델이 필요할 만큼 민주주의 체제가 근본적으로 바뀌었고 우리는 완전히 달라진 조건 속에서 살고 있는가? 저널리즘이 전통적으로 견지해 온 규범을 버리기 전에 우리는 이 질문들에 답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지금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균형이 깨지고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민주주의 정치 시스템이 흔들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일은 저널리즘의 규범적 토대를 굳건히 하여 민주주의를 되살리는 일이지, 민주주의의 위기를 핑계 삼아 저널리즘의 규범을 폐기하는 일이 아니다.
뉴스가 규범적 모델의 적용을 받지 않고 일반 소비재와 다를 바 없는 비경합적 상품이 된다면, 사회가 뉴스를 보호해야 할 이유도 없다. 혁신 담론은 산업 논리를 앞세워 규범적 모델을 비현실적이라고 폄하하지만, 저널리즘이 생존해야 할 필요성은 고유의 가치를 지키고 있을 때 비로소 발생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주장이야말로 가장 비현실적이다.
지금 진행 중인 디지털 혁신을 성공적으로 마치면 광고가 쏟아져 들어오고 언론사의 수익이 늘어날까? 광고주들이 언론에 광고를 하지 않는 이유는 디지털 혁신이 더디기 때문이 아니다. 종이든 디지털이든 언론이 더 이상 시민들의 관심과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획기적인 광고 전략을 마련하여 디지털 광고 수주를 늘린다 하더라도 언론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종이 신문에 실리던 광고의 일부가 디지털로 옮겨 오는 수준에 그칠 수밖에 없다. 생존과 수익을 위해서라도 언론사들의 선택은 규범적 모델의 회복이 되어야 한다.
언론사들은 디지털 기술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장기적 전망이 부재한 상태에서 어리석은 선택을 반복해 왔다. 그 결과로 우리는 지금 포털에 종속된 기형적 뉴스 생태계를 보고 있다. 아직도 언론사들은 눈앞의 작은 이익에 눈이 어두워 디지털을 단기적 수익 창출의 도구로만 활용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치와 언론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시민 참여를 증진시키는 디지털 기술의 잠재적 가능성을 고작 페이지 뷰와 ‘좋아요’를 늘리는 차원의 경제적 관여에 가둬 놓고 있다.
이제 디지털 기술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어야 한다. 디지털 기술을 통해 구현하려는 목표를 전환해야 한다. 근시안적 접근에서 벗어나 디지털 기술의 가능성을 집중 분석함으로써 이용자들이 공적 이슈를 더 쉽게 이해하고 언론에 더 긴밀히 관여할 수 있도록 촉진하는 전략들을 고안해야 한다. 디지털 저널리즘의 역사 초기에 일시적으로 연결되었던 저널리즘의 가치와 디지털 기술 간의 고리를 복원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디지털 기술의 대안적인 사회적 상상을 복원하고 상상을 현실로 바꾸어 나갈 필요가 있다.
저널리즘이 권력을 감시하고 시민 공중을 위해 봉사하는 데 디지털 기술이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블록체인과 저널리즘을 결합한 플랫폼 시빌(Civil)과 같은 해외의 실험은 디지털 기술의 대안적 상상을 현실화하려는 시도 가운데 하나다. 시빌은 외부 권력의 입김 때문에 정보가 왜곡되고 플랫폼에 종속되어 콘텐츠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는 저널리즘 현실을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해결하려는 시도다.
시빌의 아이디어는 다음과 같다. 언론인과 시민을 직접 이어 주는 분산형 플랫폼을 기반으로 운영되는 뉴스룸에 소속된 기자들은 광고주나 플랫폼의 영향에서 벗어나 오로지 시민들을 위한 기사를 쓴다. 시민들은 암호 화폐를 통해 기자에게 취재와 기사 작성의 대가를 제공한다. 블록체인을 활용해 정보를 공유하고 보존할 수 있기 때문에 저널리즘을 흔드는 권력의 부당한 개입과 뉴스의 조작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
블록체인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꼭 블록체인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은 시민 참여가 활발하지 않은 시빌의 앞날도 순탄하지만은 않다. 시민의 참여와 관심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독립적인 권력 비판을 가능케 하는 수단으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는 새로운 해법들을 폭넓게 모색하자는 이야기다.
디지털 기술의 이용자는 소비자이기도 하지만, 민주주의 공동체의 시민이기도 하다. 지금까지의 디지털 저널리즘이 이용자를 오로지 소비자로만 규정해 왔다면, 앞으로의 디지털 저널리즘은 이용자에게 잃어버린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되찾아 주는 방향으로 진화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디지털 혁신이다.
무엇을 버릴 것인가
저널리즘의 본질과 무관한 모든 것은 디지털 전환의 과정에서 저널리즘이 버려야 할 것이다. 디지털 이전 시대에 업무를 편리하고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고착화된 조직 체계와 익숙한 관행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가령 출입처 제도는 언론사들이 오랫동안 유지해 온 관행이지만, 기자들의 업무에 칸막이를 만들고 비판의 칼끝을 무디게 한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매체 간 차별화가 중요해진 디지털 시대에는 모든 출입처에 기자를 보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백화점식으로 모든 분야의 정보를 제공하던 종이 신문 시대의 방식을 디지털 시대에도 그대로 고집할 필요는 없다. 단순 정보 전달은 통신사에 맡기고 대다수 언론사는 각자 특화된 분야의 뉴스나 탐사 보도에 집중함으로써 시민들에게 언론의 존재 가치를 입증해야 한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탐사 보도를 전문으로 하는 뉴스타파의 성공에서 배워야 한다.
특종 또는 단독 보도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뉴스룸과 기자 집단의 문화도 버려야 한다. 플랫폼을 통해 뉴스가 소비되는 디지털 환경에서 이용자들은 어느 언론사가 특종을 했는지 관심도 없을 뿐더러 알기도 어렵다. 복제가 쉽다 보니 특종의 수명이 짧아졌고 특종을 했다고 해서 수익이 늘지도 않는다.[2] 단독 경쟁은 기자들 또는 매체들 간의 의미 없는 자존심 싸움일 뿐이다. 이제 시민들과 괴리된 그들만의 리그를 끝내고 사회적 효용이 있는 뉴스를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한다.
물론 새로운 사실을 발굴하는 일은 여전히 중요하다. 새로운 사실을 단독으로 보도하는 경쟁에 과도한 자원을 투입하고 뉴스 생산 과정의 보안을 지키는 데 에너지를 소모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앞으로는 오히려 정보 교환과 공동 취재를 통한 언론사들 간의 협업을 활성화해야 한다. 각자가 가진 특장점을 살려 시민들에게 더 유익한 뉴스를 생산하는 일이 단독 보도보다 중요하다. 위디스크 양진호 회장의 폭행 영상이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뉴스타파의 협업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고 이 보도를 계기로 두 독립 언론에 대한 관심과 지지가 높아진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나아가 언론사들은 두꺼운 커튼 뒤에서 이루어졌던 뉴스 생산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지금까지 폐쇄적 뉴스룸 안에서 뉴스를 제작하고 편집하는 일이 용인되었던 것은 권력으로부터의 독립과 취재원 보호 때문이었지만, 외부와의 단절은 뉴스에 대한 편의적 조작을 가능케 하기도 했다. 언론사 내부 메커니즘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도 양산됐다. 언론을 향한 시민들의 불신과 편견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언론이 내부 시스템과 생산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시민들을 제작에 참여시키는 것이다.
기사 작성 스타일과 뉴스의 문법도 바꿔야 한다. 역피라미드 기사 작성법은 종이 신문 시대 이래로 기자들에게 가장 익숙한 글쓰기 방식이지만, 디지털 환경에서는 최선이 아니다. 모바일 이용자의 편의나 젊은 세대의 선호에 맞추면서도 심층적 정보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새로운 내러티브가 다양하게 시도되어야 한다. 디지털 세대의 감성에 맞는 새로운 스토리텔링으로 비판적 이슈를 다뤄 주목받고 있는 미디어 스타트업 닷페이스가 전통적 저널리즘의 유산 가운데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버렸는지, 레거시 미디어들은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뉴스룸 조직의 구성과 운영 방식도 쇄신해야 한다. 정치부, 경제부, 사회부와 같이 취재 대상과 영역에 따라 조직을 나누는 방식은 더 이상 효율적이지 않다. 디지털 시대에는 지금까지 예외적이거나 한시적으로 운영되었던 특별 취재팀이나 탐사 보도팀을 중심으로 가동되는 뉴스룸이 월등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늘 해오던 방식대로 뉴스룸을 설계하는 낡은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연공서열에 따라 평기자에서 차장, 부장, 국장으로 승진하고 연차가 쌓이면 현장을 떠나 데스크를 보는 구태의연한 방식도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뉴스룸의 리더들은 더 젊어져야 한다.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기자가 국장과 부장을 맡아 뉴스룸을 지휘하고, 연륜 있는 베테랑 기자들은 현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뉴스룸은 기자들에게 편리한 방식이 아니라, 시민들에게 유익한 방식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플랫폼에서 언론을 구하라
포털은 여전히 저널리즘 현장의 뜨거운 감자다. 2018년 매크로를 활용한 네이버 댓글 조작 스캔들의 불똥이 엉뚱한 방향으로 튀면서 아웃링크 여부를 둘러싸고 포털과 언론사 간 날카로운 신경전이 벌어졌다. 언론사들은 일부 뉴스 서비스에 제한적으로 적용되는 아웃링크를 전면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포털 때리기’에 나섰다.
아웃링크를 도입하면 저널리즘이 직면한 문제들이 일거에 해결될까? 2006년 네이버의 아웃링크 제도 도입, 2009년 뉴스캐스트 서비스 시행 직후의 역사적 경험을 돌이켜 본다면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언론사들은 눈앞의 트래픽 폭탄을 즐기며 선정적 가십과 자극적 제목을 앞세운 질 낮은 뉴스를 대량 양산하며 페이지 뷰를 늘리는 데만 집중했다.
지금 아웃링크를 법제화하여 강제로 시행한다면 똑같은 상황이 펼쳐질 것이다. 오랫동안 굶주린 언론사들이 또다시 앞다투어 트래픽 사냥에 나서지 말라는 법이 없다. 포털 공간은 아수라장이 되고, 저널리즘의 신뢰는 끝없이 추락하게 될 것이다. 논란을 지켜보는 이용자들의 반응도 냉담하다. 시민들에게 아웃링크 논란은 언론사와 포털 간의 밥그릇 싸움에 불과하다. 이미 언론에 대한 믿음을 내려놓은 시민들은 민주주의와 뉴스의 품질을 명분으로 내건 언론사들의 주장에 조금도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
언론사들은 자신들이 생산한 뉴스의 경쟁력과 차별성을 과대평가하고 있다. 언론사 홈페이지에서 전문적이고 객관적인 뉴스를 소비하는 것이 이용자들에게 바람직하다는 아웃링크 도입의 명분도 여기서 비롯된다. 하지만 시민들은 레거시 미디어의 뉴스와 신생 미디어의 뉴스가 질적으로 다르다고 느끼지도, 저널리즘이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네이버의 깔끔한 인터페이스에 익숙한 이용자들은 아웃링크를 통해 광고가 덕지덕지 붙은 레거시 미디어의 홈페이지를 통해 뉴스를 이용하는 것에 전혀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지금 상황대로라면 네이버가 물러난 공간에서도 언론사들이 발붙일 자리는 없을지 모른다. 이해관계의 상충을 극복하고 언론사들이 다 함께 네이버를 빠져나와 자체적으로 별도의 뉴스 플랫폼을 만들더라도, 이용자들은 포털에 남을 가능성이 높다.
논의의 초점을 ‘트래픽을 누가 가져갈 것인가’에 맞추는 것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시민들과 민주주의에 도움이 되는 방향에서 ‘어떻게 좋은 뉴스를 만들 것인가’를 기준으로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지금의 포털 환경이 구조적으로 저질 뉴스를 양산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포털에서 뉴스를 소비하는 구조를 지금 당장 바꿀 수 없다면, 포털 중심의 뉴스 생태계에서도 양질의 뉴스 콘텐츠 제작이 가능하도록 바꾸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포털 안에서의 밥그릇 싸움에서 벗어나 포털 자체를 일정 부분 공적인 플랫폼으로 전환시키는 전략이 필요하다. 시민들의 뉴스 소비가 네이버에 일방적으로 집중되고 있는 상황은 시장에서 네이버가 갖는 독점적 지위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시민들이 네이버에 공적 가치를 요구할 수 있는 명분이기도 한다.
다른 제품과 달리 뉴스가 갖는 사회적 영향력과 공공적 가치를 고려할 때 뉴스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사업자는 공익을 목적으로 한 크고 작은 규제를 받아야 한다. 따라서 절대 다수의 사회 구성원들이 이용하는 포털도 공공성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가령 네이버가 뉴스를 노출, 배열하고 추천하는 알고리즘의 제작과 관련된 의사 결정에 시민 사회가 개입하는 방안이 있다. 널리 알려진 신화와는 달리 알고리즘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알고리즘 자체는 가치 판단을 하지 않지만, 설계하고 제작하는 사람의 가치 판단이 알고리즘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네이버의 뉴스 편집 알고리즘은 네이버의 의도에 맞게 특정한 방향으로 편향된 뉴스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포털 뉴스 서비스가 공적 규제를 받아야 한다면, 이 알고리즘을 투명하게 공개하거나 시민 사회의 합의를 거쳐 저널리즘의 원칙에 부합하도록 제작한 알고리즘을 적용하도록 강제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
이렇게 된다면 ‘좋은 뉴스’가 포털에서 이용자들에게 더 많이 노출되고 선택될 확률이 높아지면서 언론사들이 좋은 뉴스를 제작할 동기가 부여될 것이다. 어뷰징이나 가십 보도보다 팩트 체크를 거친 정확한 보도, 사회의 모순과 권력의 비리를 파헤치는 탐사 보도, 사회적 소수자의 권리에 초점을 맞춘 보도에 가중치를 두는 알고리즘은 그러한 뉴스의 제작을 북돋울 수 있다.
당장 자본주의 시장 원리에 맞지 않고 현실성도 없는 주장이라는 반론이 나올 것이다. 영업 기밀인 알고리즘을 공개하는 포털은 세계 어디에도 없으며, 저작권 등 법적 문제의 소지가 있다는 주장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익을 위해 시장 경제 원리나 재산권을 일부 제한하는 사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 보건 의료, 교육, 대중교통, 부동산 등의 영역에서 시장 논리는 무제한으로 보장되지 않는다. 미디어 분야에도 공영 방송 등 탈상품화된 영역이 존재한다.
다양한 탈시장적 규제에는 사회적 합의가 있다. 포털의 공공성도 사회적 합의만 이루어진다면 얼마든지 강제할 수 있다. 적어도 커뮤니케이션과 저널리즘의 영역에서 자본주의의 원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의 원리다. 이용자들의 이해와 요구를 언제나 존재의 명분으로 내세워 온 포털이라면, 결국 이용자들의 민주적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좋은 언론을 키우려면 온 사회가 필요하다
디지털 저널리즘은 사회 변동의 산물이다. 한국 디지털 뉴스 생태계의 진화는 한국 사회의 변화 과정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디지털 저널리즘을 바꾸는 일은 언론사만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 사회가 먼저, 그리고 함께 변해야 한다. 디지털 저널리즘의 문제가 애초부터 개별 미디어의 전략적 실패가 아닌 사회 구조적 모순에서 연원한 것이라면, 해결책 역시 사회적 차원에서 모색되어야 한다.
언론 정책의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좋은 언론을 키우려면 온 사회가 필요하다. 단절과 분리의 길을 가고 있는 저널리즘과 민주주의를 다시 결합시키는 일은 개별 언론사 단위에서 실현할 수 없다. 언론사들이 대안적인 디지털 혁신을 통해 거듭나는 동안, 언론이 민주주의에 기여하는 뉴스를 만들 수 있도록 사회 공동체도 제도를 개선하고 후원해야 한다.
가장 시급한 일은 디지털 이후 심화된 뉴스의 상품성을 약화시키기 위한 기획이다. 뉴스의 상품으로서의 속성을 제거하거나 공공재로서의 속성을 강화해도 뉴스 미디어가 생존할 수 있도록 사회가 충분한 보상을 제공해 주어야 저널리즘의 가치에 충실한 탈상품화된 뉴스가 지속적으로 공급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문제는 이미 수명이 다한 저널리즘의 전통적 수익 모델을 대체할 새로운 수익 모델을 마련하는 일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해외의 아이디어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미국 학자 로버트 맥케즈니(Robert McChesney)는 모든 성인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비영리 뉴스 미디어를 지정해 기부하거나 개별 뉴스에 후원금을 낼 수 있는 쿠폰을 정부가 제공하는 ‘시민 뉴스 바우처(Voucher) 제도’를 제안한다.[3] 프랑스 학자 줄리아 카제(Julia Cagé)는 뉴스 미디어의 소유 구조를 비영리 기관과 주식회사의 장점을 결합한 ‘비영리 미디어 주식회사’ 형태로 전환하고, 시민들의 활발한 투자를 유도하되 이들에 기부 또는 참여하는 액수만큼 정부가 세액 공제를 해주는 제도를 권한다.[4]
이러한 아이디어들은 모두 뉴스를 돈을 주고 시장에서 사고파는 상품이 아닌,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호혜성에 바탕을 둔 공공재로 바꾸는 전략이라 할 수 있다. 뉴스가 가속화되고 있는 상품화의 흐름에서 벗어나고, 궁극적으로는 상품의 성격을 탈피해야 올바른 저널리즘이 가능하다는 문제의식이다.
다행스럽게도 한국 사회 구성원들은 ‘좋은 뉴스’에 대한 후원 의사가 강하다. 〈디지털 뉴스 리포트 2018〉에 따르면, ‘좋아하는 언론사가 비용을 충당하지 못한다면 기부에 참여하겠다’고 응답한 비율은 한국이 29퍼센트로 조사대상 22개국 중 1위였다. 사회 정의를 위해서라면 언론에 기꺼이 돈을 지불할 의사가 있다는 것이다. 의지를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방아쇠 역할을 정부가 맡는다면, 뉴스 미디어들이 품위와 원칙을 지키는 저널리즘을 실현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뉴스의 공적 성격을 강화하는 데는 막대한 공적 재원이 소요된다. 정부는 언론을 지원하는 목적의 ‘민주주의 펀드’를 조성하여 획기적인 기금을 확충할 수 있다. 해외 선진국에서는 언론을 위한 기금 조성이 별난 일이 아니다. 2015년을 기준으로 프랑스의 언론 지원 기금은 1700억 원 규모다. 인구가 570만 명에 불과한 덴마크도 687억 원의 기금을 마련해 언론을 지원한다. 한국의 언론 진흥 기금은 400억 원이 채 안 되며, 그나마도 고갈 상태나 다름없다.[5]
불신의 대상인 언론을 위한 재원을 마련하는 데 국민의 혈세를 쓰는 일을 마뜩지 않게 여기는 시민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언론사 기업을 돕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언론을 매개로 시민 민주주의의 유지와 발전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 생각한다면, 아까울 만큼의 거액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양질의 저널리즘으로부터 실질적인 도움을 받게 될 시민들이 정부를 향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 사회가 작동하는 원리이다.
우리가 결국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은 언론과 시민 간의 건강한 파트너십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과 시민은 본래 서로를 필요로 하는 상호 의존적 관계다. 디지털 기술은 둘을 전에 없이 긴밀하게 이어 줄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이제 디지털 저널리즘이 시민을 배반하는 언론, 언론을 외면하는 시민 사이에 놓인 벽을 허물고 민주주의를 위한 공생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언론과 시민들의 힘찬 이인삼각을 기다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