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은 러시아의 석유와 가스에 지나치게 의존해 왔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이 끔찍한 실수의 정체가 드러났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1970년 2월 1일 일요일, 독일과 소비에트연방의 고위급 정치인들과 가스회사 임원들이 에센(Essen)에 있는 최고급 숙박시설인 호텔 카이저호프(Hotel Kaiserhof)에 집결했다. 러시아와 독일을 잇는 가스관에 관한 계약 체결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였다. 이는 독일과 소련을 잇는 첫번째 주요 파이프라인으로,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바이에른의 마르크트레드비츠(Marktredwitz)에 있는 서독의 국경까지 이어질 예정이었다. 이 계약은 아홉 달에 걸친 치열한 협상의 결과였다. 그들은 가스의 가격, 독일이 러시아에 판매할 파이프 120만 톤의 비용, 그리고 17개의 독일 은행들로 구성된 컨소시엄이 모스크바 측에 제시할 지불조건 등을 두고 협상을 벌였다. 러시아의 디폴트(default) 위험을 알고 있었던 독일 은행 측의 재무 부문 협상 책임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크리스티안스(Friedrich Wilhelm Christians)는 이에 대한 예방조치 차원에서 독일 연방정부에 대출을 요청하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저는 안전망 없이는 공중제비를 하지 않습니다. 특히나 훨씬 더 위험한 공중그네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 관계는 양국 모두에게 이익이 될 예정이었다. 독일은 기계장비와 고품질 산업 자재들을 공급하고, 러시아는 원료를 공급하여 독일의 산업 분야에 힘을 실어줄 수 있었다. 고압 파이프라인과 그것을 지원하는 기반 시설들은 양국의 신뢰와 협력은 물론, 긴밀한 상호 관계가 필요하기 때문에 두 나라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잠재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상업 거래 이상이었다. 당시 모임의 장소가 된 호텔에 독일 경제 장관이었던 칼 쉴러(Karl Schiller)가 나타났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그 전 해에 서독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총리가 동독을 포함하는 소비에트연방 및 그 동맹국들을 향해 추진하기 시작한 새로운 ‘오스트폴리티크(Ostpolitik, 동방정책)’의 지지자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순간이었다. 경제학자였던 쉴러 장관은 이를 두고 “동구권의 우리 이웃들과 정치적이며 인류애적인 정상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이 사업이 정서적으로는 충분히 환영할 만한 일이었지만, 일부에서는 잠재적인 위험성을 지닌 움직임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었다. 나토(NATO)는 이 계약이 체결되기 전에 독일의 경제부에 조심스럽게 서한을 보내어 이 사업이 (나토의) 안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질의를 했다. 이에 대해 당시 경제부의 가스 담당 국장이었던 노베르트 플레서(Norbert Plesser)는 독일이 러시아에 의지하게 될 천연가스의 양은 전체 공급량의 10퍼센트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전혀 우려할 만한 이유가 없다고 나토에 장담했다.
반세기가 흐른 2020년, 러시아는 독일 천연가스 공급량의 절반 이상을 공급하게 된다. 그리고 독일의 가정의 난방을 담당하고 공장을 가동하며 차량의 연료로 주입되는 전체 석유의 약 3분의 1을 공급했다. 독일의 철강 제조에 필요한 석탄 수입량의 절반가량 역시 러시아에서 들여오고 있었다.
그 시절, 적국에 대한 평화적인 개방의 움직임으로 시작되었던 계약은 어느새 침략의 수단으로 변질하였다. 독일은 현재 러시아가 벌이고 있는 전쟁에 자금을 지원하고 있는 꼴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 두 달 동안, 독일은 러시아의 에너지 수입 비용으로 거의 83억 유로를 지불한 것으로 추산된다. 모스크바는 이 돈으로 루블화의 가치를 떠받쳤고 도네츠크(Donetsk)에 주둔한 우크라이나 군대를 포격하기 위한 화기를 구입했다. 같은 시기에 유럽연합(EU)의 국가들은 러시아의 에너지 수입 비용으로 모두 390억 유로를 지불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그들이 우크라이나의 방어를 돕기 위해 내놓은 지원금 총액의 두 배가 넘는 수치이다. 참으로 고통스러운 아이러니이다. 역사학자인 티머시 스나이더(Timothy Snyder)는 최근 자신의 트위터에 이런 글을 썼다. “독일인들은 지난 30년 동안 우크라이나인들에게 파시즘에 관해 가르쳤다. 그러나 실제로 파시즘이 도래하자, 독일인들은 거기에 자금을 지원했고, 우크라이나인들은 파시즘과 싸우며 죽어갔다.”
지난 2월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독일은 모순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원자력 발전을 중단하고 사용을 중단해 가면서 에너지 체제의 전환을 추진하고 있었던 독일로서는 러시아의 천연가스 외에는 거의 아무런 대안이 없었던 것이다. 독일 정부는 애초의 동기가 무엇이었든 간에 러시아의 에너지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된 구조를 만든 자신들의 결정이 치명적인 실수였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의 아날레나 베어보크(Annalena Baerbock) 외무장관은 독일이 폴란드나 발트 3국처럼 한때 러시아의 점령으로 고통받았던 나라들의 경고를 새겨듣지 못했다고 말한다.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 전 총리의 기독민주연합(CDU) 내각에서 환경장관을 역임했던 노르베르트 뢰트겐(Norbert Röttgen)은 독일 정부가 가스를 저렴하게 공급받기 위해 재계에는 “너무나도 쉽게” 고개를 숙였던 반면, “지정학적인 위험성은 완전히 무시했다”고 말한다.
올해 2월, 독일의 경제・기후행동부 장관이자 녹색당 대표인 로베르트 하베크(Robert Habeck)는 독일에 있는 (러시아의 국영 천연가스회사인) 가스프롬(Gazprom) 소유의 가스 저장시설이 천연가스의 가격을 끌어올리고 정치적인 압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지난겨울에 “조직적으로 비워졌다”고 밝혔다. 다소 충격적인 이 발언은 러시아가 독일의 에너지 공급에 있어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셈이었다.
앙겔라 메르켈 내각에서 재무장관을 지냈던 볼프강 쇼이블레(Wolfgang Schäuble)도 이렇게 말한다. “제가 틀렸습니다. 우리 모두가 틀렸습니다.”
독일의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Frank-Walter Steinmeier) 대통령조차도 최근 몇 주 사이에 자신의 신념을 철회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사회민주당(SPD)의 상징적 인물이자 동서 교역의 ‘가교(bridge)’를 놓는 것을 독일 내에서도 가장 크게 옹호했던 대변인이다. 그는 새로운 해저 가스관인 노르트스트림-2(Nord Stream 2)의 건설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러시아의 의도를 오판했다고 시인했다. 지난 4월 그는 독일 언론들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노르트스트림-2를 고수했던 것은 명백한 실수였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양국 간의 가교가 될 것이라고 단단히 믿고 있었죠. 러시아조차도 더 이상 믿지 않았고, 우리의 파트너들이 우리에게 경고했던 노르트스트림-2를 말입니다.” 이러한 발언은 사회민주당 소속으로 1998년부터 2005년까지 집권했던 게르하르트 슈뢰더(Gerhard Schröder) 전 총리의 핵심 참모로 활약했으며 이후에는 (외무장관, 부총리, 연방대통령 등을 지내며) 엄청난 보상을 받았던 사람으로서는 이례적인 표현이다. 물론 그러한 과정에서 그는 블라디미르 푸틴의 로비스트라는 비난도 엄청나게 들어야 했다. 슈타인마이어 역시 메르켈 총리의 내각에서 외무장관을 지냈는데, 그는 교역과 대화를 통해 사회와 정치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내용의 ‘교역을 통한 변화(Wandel durch Handel)’라는 개념을 가장 크게 설파하던 인물이었다.
독일은 어쩌다 이런 실수를 저지르게 되었을까? 일부에서는 푸틴이 2011년에 대통령 지위로의 복귀를 선언했을 당시에, 그가 러시아를 권위주의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메르켈 전 총리가 간파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2014년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에도 독일은 러시아산 가스의 수입을 중단하려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심지어 메르켈 총리가 심각한 무역 제재를 부과하겠다고 위협했지만, 독일의 재계가 설득에 나서서 그녀의 입장을 거둬들이게 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권위주의 국가들이 교역을 통해 변화될 수 있다는 헛된 믿음 속에서 지난 50년 동안 더욱 고질적인 판단 착오가 지속되어 왔다는 비판이 나온다.
사회민주당은 이제 오스트폴리티크(Ostpolitik) 정책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변질한 것인지, 특히 베를린 장벽의 붕괴라는 위대한 업적을 성취한 이후에 그것이 기형화된 것인지에 관한 재검토에 착수했다. 참고로 오스트폴리티크는 1963년 7월에 당시 서베를린의 시장이었으며 훗날 총리직에 오르는 빌리 브란트의 최측근 고문이었던 에곤 바르(Egon Bahr)의 기념비적인 연설로 첫선을 보였다.
그런데 다수의 회고록과 남아있는 기록을 통해 그 역사를 추적하다 보면 특이한 사실이 발견된다. 그것은 바로 (미국의 대통령 안보 보좌관이었던)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를 필두로 수많은 이들이 독일에 그 협정의 체결을 결국엔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매우 단호한 경고를 여러 차례 날렸다는 점이다. 키신저는 1970년 4월 9일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독일 안팎에서 브란트 총리가 (서독을) 동구권에 팔아넘긴다고 보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우려하는 것은 그가 과연 자신이 시작한 일을 통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난 50년 동안 독일은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가 점점 증가하는 상황에 관하여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과 지속해서 갈등을 빚었다. 이 과정에서 독일의 외무부는 미국의 반공주의가 순진하다는 견해와 오직 독일만이 소비에트연방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을 만들어냈다.
1960년대 후반부터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은 소련의 지도부와 직접 연락하는 자체적인 통신 라인을 개설하려 노력했다. 독일의 통일을 위한 관심은 당연히 미국과의 긴장을 조성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비판을 마주하면, 그들은 습관처럼 자국의 특별한 지위를 언급하곤 했다. 1980년 1월에 한스-디트리히 겐셔(Hans-Dietrich Genscher) 당시 외무장관은 독일 연방의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강압에 의해 두 개의 나라로 나뉘어 살고 있는 독일의 국민보다 유럽의 데탕트(détente)와 균형을 위해서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발언은 의회에서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런데 독일은 대체 왜 1989년에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이후에도 여전히 다른 이들의 말에 귀 기울이기를 꺼렸을까? 2차 세계대전에서 그들이 구소련을 상대로 잔혹행위를 저질렀다는 죄책감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오스트폴리티크를 통해서 그들이 러시아와의 관계를 개선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독일이 과거의 잘못에 사로잡힌 이중의 포로였을 수도 있다. 한편에서는 그들이 저지른 끔찍한 참상에 대한 죄의식에 묶여 있었고,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러한 끔찍한 참상에 대한 그들의 대응이 옳다는 믿음에 붙들려 있었다.
1. 철의 장막을 뚫은 가스관
70년대와 80년대에 미국에서 지미 카터(Jimmy Carter)와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이라는 매우 다른 성향의 두 명의 대통령이 재임하는 동안, 독일과 미국 사이에 있었던 이러한 갈등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대서양 연안에서 벌어진 가장 적대적인 전투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역사학자인 메리 엘리스 사롯(Mary Elise Sarotte)은 이렇게 지적한다. “이러한 분쟁은 모두 냉전 시기에 서독의 외교정책이 독자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미국의 일부 지도자들은 이를 불편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카터 대통령과 독일의 헬무트 슈미트(Helmut Schmidt) 총리는 서로를 거의 존중하지 않았다. 카터는 슈미트의 기분이 변덕스럽다고 생각했던 반면, 슈미트 총리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카터 대통령을 두고 “이상주의적인 전도사”라고 치부했다. 슈미트는 카터가 유럽의 현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며, “이런 일을 할 만큼 배포가 크지 않다”고 말했다. 두 지도자는 개인적으로 서로의 신경을 자극했던 것만이 아니라, 러시아의 인권 문제에 대응하는 방안을 포함하여 여러 중요한 사안에 관해서도 서로 의견을 달리했다. 1979년에 슈미트와 카터는 나토가 유럽에 배치하는 핵무기를 업그레이드하는 한편 러시아와는 적극적으로 군축 협정을 추진한다는 소위 ‘더블트랙 결단(Double-Track Decision)’이라고 부르는 내용에 대하여 뜻을 함께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외의 사안들에 대해서는 접근방식이 서로 매우 달랐다.
슈미트 총리는 결코 자신감이 부족한 인물이 아니었지만, 당대의 수많은 독일인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도 끔찍한 전쟁의 기억에서 솟아오르는 깊은 수치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또한 러시아의 핵전력을 고려할 때 동구권의 안정이 서독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자서전에서 그는 “유럽의 물자에 대한 소련의 의존도”를 더욱 높이고 그에 대한 대가로 모스크바의 정책 결정에 있어서 “유럽의 영향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러시아와의 교역 관계를 발전시키고 싶었다고 썼다. 그리고 1973년의 석유 위기 이후, 슈미트 총리는 걸프만의 국가들보다는 구소련이 독일의 에너지 공급원으로서 더욱 안정적이라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반면, 카터 대통령은 소련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교역하지 않는 것이 더욱 나은 방법이라고 여겼다. 모스크바가 소련의 반체제 인사들인 알섹산드르 긴즈버그(Aleksandr Ginzburg)와 아나톨리 샤란스키(Anatoly Shcharansky)를 투옥하자, 이에 대한 대응으로 1978년 7월 카터는 미국의 기술이 소련의 석유 및 천연가스 산업의 탐사와 개발을 위해 수출되는 것을 제한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유럽에서의 비즈니스는 미국의 의도와는 반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심지어 소련이 1979년에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이후에도 독일의 대규모 기업 대표단은 모스크바 방문을 강행했다. 소유즈가스익스포트(Soyuzgazexport, 연방천연가스수출공사)로 대표되는 소련 측과 루르가스(Ruhrgas)와 가즈드프랑스(Gaz de France)로 대표되는 서유럽 측은 시베리아 서부의 거대한 우렌고이(Urengoy) 천연가스전(gas field)으로부터 4500킬로미터 길이의 전용 파이프라인을 1980년 말 서유럽까지 연결한다는 대규모의 신규 가스 공급 프로젝트 협상을 완료했다. 이러한 합의로 인하여 러시아산 천연가스에 대한 독일의 의존도는 15퍼센트에서 30퍼센트까지 높아질 것으로 예상되었다. 독일 내각은 이러한 의존도 상승이 안보에 미치는 영향을 검토한 후, 러시아가 고의로 가스관을 틀어막을 위험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내각이 이렇게 판단한 이유는 간단했다. “장기적인 공급 중단은 소비에트연방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슈미트 총리는 그해 3월 5일 카터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 자신은 가스관 사업을 지지한다고 설명했다. “서로 교역하는 당사자들끼리는 상대를 향해 총을 쏘지 않습니다.” 그의 발언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명성을 얻었던 노먼 에인절(Norman Angell)의 이론을 다시금 꺼낸 것이었는데, 에인절의 논리는 각 국가 사이의 새로운 상호의존성이 전쟁을 무가치하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내용이었다. 자신의 일기에 남긴 메모에 의하면, 당시 카터는 이렇게 응답했다. “유럽인들은 우리가 (소련에) 채찍을 가하기를 기대하면서, 정작 그들은 가장 커다란 당근을 주기 위해서 서로 경쟁한다. 이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1980년, 슈미트 총리는 이렇게 썼다. “모스크바에 대한 연방공화국(서독)의 경제적 의존이 외교정책에 영향을 미칠 만큼 지대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지하거나 악의적이다.” 현재 독일이 처한 곤경을 고려할 때, 이러한 그의 발언은 처참한 오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2. 독일이 옳았다, 그 순간에는
카터가 물러나자 슈미트 총리는 더욱 까다로운 적수를 상대하게 되었는데, 그는 바로 전통적인 반공주의자였던 로널드 레이건이었다. 레이건의 시선에서 보자면, 독일과 러시아의 교역은 서방의 안보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다. 레이건의 이러한 견해는 1981년에 제출된 CIA의 보고서에 기반을 두고 있었는데, 그들은 여기에 뚜렷한 추세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었다. 서유럽에 대한 소련의 천연가스 수출량은 1970년의 연간 10억 세제곱미터에서 1980년에는 265억 세제곱미터로 증가했다. CIA는 레이건에게 우렌고이 가스 프로젝트가 단지 소련 경제의 성장을 가속화하는 것만이 아니라 소련에 80억 달러의 경화(hard currency)를 제공하여 추가적인 군비 증강을 촉진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독일이 소련의 사고방식을 마음대로 지배하는 것도 어림없다고 보았다. “이 프로젝트는 오히려 소련에 추가적인 급소를 드러냄으로써, 소련이 서유럽으로 하여금 냉전 상황에 관한 자신들의 견해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기 위한, 광범위한 외교적 공세의 일환으로 활용할 수 있다.”
당시의 논쟁은 현재 상황을 연상시킨다. UN 주재 미국 대사였던 진 커크패트릭(Jeane Kirkpatrick)은 이렇게 불평했다. “우리는 이러한 논의에서 프랑스가 자국 천연가스의 15퍼센트를, 그리고 독일이 30퍼센트를 수입하는 등 동맹국들이 이미 상당히 의존적이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했습니다.” 슈미트 총리는 미국에 “만약 소련이 가스 공급을 중단하더라도 독일이 6개월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이라며 장담했다. 만약 현재 상황에서 그런 사태가 벌어진다면 독일은 곧바로 에너지 배급 체제, 혹은 그와 유사한 체제로 전환해야만 할 것이다.
유럽이 자발적인 금수 조처를 취하도록 설득하기 위하여 미국이 대체 에너지원의 제공을 포함한 다양한 시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1981년에 루르가스주식회사(Ruhrgas AG)와 소유즈가스익스포트는 협상을 지속하여 결국엔 25년 동안 연간 105억 세제곱미터의 천연가스를 수입한다는 계약을 체결했다. 당시 유럽의 실업률은 9퍼센트 가까이 치솟았고, 유럽의 산업 분야는 에너지 공급을 늘릴 필요가 있었다. 동시에 미국이 지적하는 안보 우려에 관한 주장은 미국의 석유산업을 홍보하려는 기만 전략이라며 무시되었다.
1981년 12월 13일에 폴란드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했는데, 당시 소련은 이를 지지하고 나섰다. 그러자 레이건은 이러한 충격적인 사건을 계기로 독일의 가스관 연결 계획을 단념시킬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1981년 12월 19일에 영국의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 총리에게 보낸 비공개 서신에서, 레이건은 대처 총리가 소련에 대한 강력한 제재를 지지해달라고 촉구했다. “이것은 인류 역사의 분수령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인류 내부의 압제에 대한 도전이 될 것입니다.” 대처는 그녀답지 않게 주저하면서, 레이건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독일은 가스관 프로젝트를 포기할 수도 없고, 포기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미국은 (서방에 대한) 소련의 간섭에 대응하여 미국 기업들이 해당 파이프라인 사업에 도움을 제공하는 것을 금지했다. 1982년 여름, 레이건은 유럽 기업에 일정한 제재를 부과해 가스관 연결 계획의 중단을 꾀했다. 이러한 제재는 특히 이란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요즘에는 미국이 흔히 사용하는 외교적인 무기이지만, 당시에만 하더라도 그것은 유럽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대처 총리는 영국 하원에서 이렇게 불평을 토로했다. “매우 힘이 센 한 국가가 기존에 체결된 계약의 이행을 방해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11월이 되자 레이건 대통령도 제재를 부과하려던 시도를 포기했다. 양측의 힘겨루기에서 유럽은 독일 편을 들었고, 세계의 초강대국은 패배했다. 새로운 가스관은 1984년 1월 1일부터 가동을 시작했다.
교역을 통한 변화를 주장하는 독일인들이 승리했다. 1989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러시아에 대한 미국의 입지는 더욱 약화하였다. 공산주의의 평화적인 붕괴는 교역을 통한 대화와 관계를 옹호했던 이들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으로 선전되었다. 2008년 3월 브란트 재단(Brandt Foundation)을 위한 연설에서 (당시 독일의 외무장관이었던) 슈타인마이어는 이러한 견해를 확실하게 표출했다. “오스트폴리티크가 실제로 성취한 것은, 당시에 비판했던 사람들도 지금은 그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만, 많은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유럽을 더욱 확실히, 평화롭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동유럽에서의 민주화 운동에 있어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고 새롭게 나아갈 여지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마침내 두 진영 사이의 대립을 종식한 핵심적인 요인이었습니다.”
현재 독일의 총리인 올라프 숄츠(Olaf Scholz)는 여전히 이러한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지난해 그는 오스트폴리티크가 구소련의 몰락에 이바지했으며, 동유럽의 여러 국가가 민주화되고 EU에 가입하게 만드는 기초를 마련했다고 주장했다.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공동대표인 라르스 클링바일(Lars Klingbeil) 역시 이렇게 주장해왔다. “오스트폴리티크는 독일의 통일과 냉전 종식의 기반이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연방공화국(서독) 내에서도 (동서의) 갈등이 대화를 통하여 해소될 수 있다는 공감대가 조성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욕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역사학자와 저술가들은 오스트폴리티크에 관한 이런 장밋빛 묘사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학자인 얀 베흐렌즈(Jan Behrends)는 “모스크바에 대한 빌리 브란트의 데탕트 정책이 곧바로 철의 장막(iron curtain)을 무너트리고 독일의 통일을 이끌었다는 생각은 일정 부분 지나치게 단순화된 것”이라고 말한다. 또, 독일의 저널리스트이자 오스트폴리티크를 비평하는 새로운 책을 저술한 토마스 우르반(Thomas Urban)은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독일의 통일에 있어서 오스트폴리티크가 기여한 역할이 과장되어왔다고 생각한다. 그는 “소비에트연방을 붕괴시킨 결정적인 요인은 레이건 행정부의 군비증강과 시중에 넘쳐나는 저렴한 석유였다”고 분석했다. 그는 러시아 정부의 세입 예산에서 에너지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아져 왔으며, 그런 상황에서 1980년대 중반에 유가가 폭락하자 외국의 자본을 연결하는 러시아의 생명줄이 말라버렸다고 지적한다. “미카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는 해외에서 벌이는 전쟁이나 구 소련의 공화국들에게 더 이상 자금을 지원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독일 내의 논의에서는 이러한 사실이 완전히 배제되었는데, 특히 좌파 진영에서 더욱 그랬습니다.”
우르반은 교역을 통해 변화를 이끈다는 오스트폴리티크 이론이 두 가지의 기본적인 오해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한다. 첫째는 동유럽에서의 정치적 변화가 시민운동 세력이 아닌 엘리트 권력층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믿음이다. 둘째는 “다른 무엇보다도 안보가 가장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3. 새로운 세기, 새로운 국면
2000년을 전후한 시기에도, 교역을 통한 변화를 주장하던 이들은 매우 건재했다. 자신감이 더욱 충만해진 슈뢰더 총리는 러시아와의 전략적 파트너십이라는 아이디어를 설파했다. 그는 2001년에 당시 신임 대통령이었던 블라디미르 푸틴을 독일 의회로 초청하여 연설하게 했다. 그곳에서 푸틴은 유창한 독일어로 연설했을 뿐만 아니라 “냉전은 끝났습니다”라고 선언하며 청중을 사로잡았다.
푸틴의 연설을 지켜보던 슈뢰더는 유럽과 독일, 그리고 러시아 사이에 평화, 안정, 다자주의(multilateralism), 경제성장이라는 이해관계가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슈뢰더는 푸틴이 “러시아를 민주국가로 변화시키고 싶어 한다”고 확신했다.
이처럼 우호적인 정치적 여건 속에서, 당시에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동유럽경제관계독일위원회(German Committee on Eastern European Economic Relations)의 클라우스 만골드(Klaus Mangold) 위원장과 같은 친러시아 성향의 독일 로비스트들은 또 다른 가스관의 건설을 추진했다. 이번에는 러시아의 비보르크(Vyborg)에서 발트해의 해저를 지나 독일까지 천연가스를 끌어온다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첫 번째 노르트스트림(Nord Stream)이었다. 그런데 이 계획은 뜻밖의 논란을 초래했다. 그 이유는 가스관이 폴란드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를 거치지 않고 발트해 쪽으로 우회함으로써 해당 국가들의 수입이 줄어들게 되고 그들의 외교적 협상력을 약화하며,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통과 수수료를 박탈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74억 유로에 달하는 파이프라인 건설비용은 독일의 민간기업인 바스프(BASF)와 에온(E.ON), 그리고 러시아 정부가 지분의 과반을 보유한 가스프롬(Gazprom)이 부담하기로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가스관 건설에 대한 반대가 단지 미국만이 아니라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처럼 구소련의 지배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된 국가들에서도 터져 나왔다. 당시 폴란드의 국방장관이었던 라도스와프 시코르스키(Radosław Sikorski)는 이 계획을 1939년에 나치 독일과 구소련 사이에 체결하여 나치에게 폴란드 침공의 길을 열어주었던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Molotov–Ribbentrop Pact, 독소 불가침 조약)에 빗대며 맹비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5년 9월 8일에 베를린에서 가스프롬, 에온, 바스프의 대표단이 노르트스트림-1 계약에 서명했다. 10일 뒤에 치러진 독일 총선에서 슈뢰더의 사회민주당은 앙겔라 메르켈이 이끄는 보수 세력에게 패배하게 된다. 당시 조인식 현장에 푸틴은 슈뢰더와 나란히 서 있었다.
이후 슈뢰더는 독일이 러시아의 에너지에 의존하게 된 데에 있어 가장 큰 책임이 있으며, 그 과정에서 거액의 부를 챙겼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그러나 최근 독일의 저명한 외교관이었던 볼프강 이싱거(Wolfgang Ischinger)는 슈뢰더가 20년 전에 노르트스트림 계획을 승인한 것과 관련해 비난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지난 4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그러한 결정이 러시아의 에너지에 위태로운 의존 상황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에 대하여 대부분의 독일 정치인들이 의문을 던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해당 기사에서 슈뢰더 역시 같은 취지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문제가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건 단지 독일인들을 위해서, 독일의 중공업을 위해서, 그리고 독일의 화학 산업을 위해서 가스를 공급하는 방안이었으며, 아무런 문제나 반대도 없었습니다.”
이후 독일과 러시아의 관계에 일부 차질이 있긴 했지만, 교역을 통한 변화라는 믿음이 쉽게 바뀌지는 않는 것처럼 보였다. 2008년에 러시아가 조지아에서 ‘평화강제작전(peace enforcement operation)’을 실행했을 때도, 2009년 1월에 우크라이나와의 분쟁 과정에서 러시아가 가스관 가동을 중단시켰을 때도,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가 신뢰했던 드미트리 메드베데프(Dmitry Medvedev)를 갈아치우고 푸틴이 2012년에 다시 대통령직에 복귀하려 계획하던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노르트스트림이 마침내 개통된 2011년에 독일의 대러시아 수출액은 34퍼센트 증가하여 총 270억 유로에 이르렀다.
그러던 와중에 2014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초기에만 하더라도 러시아의 침공은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였다. 메르켈 총리는 크림반도의 합병은 국제법 위반이라며 러시아의 침공을 명확히 비난했다. 러시아에 대한 제재도 때맞춰 시행되었고, 러시아에 대한 독일의 수출은 줄어들었다.
2014년의 침공 이후,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 FAZ)과 같은 독일의 권위 있는 매체들은 독일이 러시아의 에너지에 위험하게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장문의 기사들을 발행했다. 액화천연가스(LNG) 터미널을 새로 구축하여 독일이 카타르나 미국 등에서 천연가스를 수입하는 것과 같은 수많은 방안이 제시되었지만, 지금까지도 별다른 진전은 없다. 이후로도 실질적인 다각화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달 필자는 카타르의 에너지 관계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는 자신들이 독일의 에너지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 5년 동안 노력했지만, 그때마다 그곳으로 들어가는 길이 막혀있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독일이 러시아를 상대로 부과한 일부 제재들이 몇 년 동안 지속되긴 했지만, 교역을 통한 변화를 주장하는 이들은 다시 서서히 그들의 기반을 다졌다. 러시아가 무슨 일을 저지르더라도 그들의 자신감을 뒤흔들 수는 없을 것으로 보였다. 2015년 9월 4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된 동방경제포럼(Eastern Economic Forum)에는 푸틴도 참석했는데, 이곳에서 발트해의 해저에 노르트스트림-2 가스관 건설을 위한 합의안이 체결되었다. 이는 러시아의 천연가스에 대한 독일의 의존도를 훨씬 더 높일 수도 있는 계획이었다. 가스프롬은 또한 독일의 천연가스 저장 기업을 인수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독일의 에너지 비축에 대한 통제권이 외부 세력에게 넘어갈 수도 있었다.
4. 죄책감이 불러온 오판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이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해 독일은 완강하게 부정하고 있다. 그 이유에 관해, 일부는 난잡하고 일부는 추상적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많은 설명들이 제시되었다. 일부에서는 공직에서 근무하다가 아무런 어려움 없이 푸틴의 밑으로 자리를 옮긴 사회민주당(SPD)의 정치인들과 공무원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들은 유럽연합과 독일의 규제환경을 가스프롬의 입맛에 맞게끔 변경하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독일과 러시아를 연결하는 산업계의 로비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독일-러시아 포럼(German-Russian Forum)이 있는데, 이들은 러시아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일 기업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자금 일부까지 지원받고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이 포럼의 활동은 중단되었다.) 포럼의 이사회는 주로 재계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러시아에 경제적 이해관계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사회의 의장인 마티아스 플라체크(Matthias Platzeck)는 사회민주당 소속으로 브란덴부르크의 주지사를 지냈던 인물인데, 그는 푸틴의 침공에 진심으로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제가 틀렸습니다. 최근까지도 저는 (이런 침공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앞서 소개한 역사학자인 사롯은 다른 나라들보다 독일에서 유독 기업들이 정치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몇 년 동안 러시아는 독일의 정치권을 굴복시키고 때로는 부패시키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폴란드의 외무장관인 즈비그녜프 라우(Zbigniew Rau)는 지난 5월 말에 베를린을 방문한 자리에서 독일의 오스트폴리티크를 두고 “재앙”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상호의존성의 정치적 가치를 말하는 독일의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저렴한 에너지를 통해서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스트폴리티크의 심리적인 근원을 조사했던 토마스 우르반은 독일이 러시아와의 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 향수와 죄책감이라는 두 가지의 정서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들에게는 (독일을 통일했던) 비스마르크(Bismarck)에 관한 추억이 있습니다. 그는 러시아와의 동맹이 유럽의 안정을 위한 버팀목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독일인들에게는 그들이 1941년에 소비에트연방을 공격하여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에 대한 죄책감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독일로서는 붉은 군대(Red Army)나 소련의 탄압을 자유롭게 비판하기가 어렵습니다. 소련을 비판하면 정작 자신들이 역사상 최악의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독일은 소비에트연방의 어두운 측면에 대해서 눈을 감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푸틴으로서는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에서 살해된 사람들에 관해서는 입을 다문 채, 오직 러시아의 전사자들만 언급하면서 선전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독일이 러시아와의 교역을 통해서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의 상당 부분은 희망적인 생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예를 들자면 외무장관이었던 슈타인마이어는 희망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에 대한 독일의 믿음이 근거 없는 것으로 판명될 경우를 대비한 대안이 필요하다는 외무부의 조언을 무시하고 그들에게서 끊임없이 개혁의 조짐을 발견해내려 노력했다. 2016년에 슈타인마이어는 예카테린부르크대학교(Yekaterinburg University)에서 눈물이 어릴 정도로 진심이 담긴 연설을 했는데, 그는 여기에서 독일과 러시아가 과연 여전히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지에 대하여 질문을 던졌다. 그는 크림반도의 합병이 최악의 순간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화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양국이 서로에게 등을 돌리지 말 것을 촉구했다.
그것은 시대의 흐름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느낀 한 인간의 연설이었다. 그리고 대화를 신봉했던 자신의 믿음이 지금과 같은 가혹한 시기에는 더 이상 옳지 않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 이의 발언이었다. “정치적 논의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것에 조금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말하는 의견을 듣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른 편 사람들에 관한 생각을 이미 굳힌 사람들의 의견을 들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이미 정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굳이 파악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의 의견을 들을 때도 있습니다.” 그는 서방과 러시아의 관계를 “가상의 적대 의식(supposed antagonism)”이라고 표현했는데, 그가 두려워했던 것은 외교와 평화를 추구해야 하는 흐름에 역행하여 그러한 적대 의식이 고착화되고 이데올로기에 의해 휘둘리는 것이었다.
슈타인마이어는 현재 독일의 대통령이자 국가원수이다. 그는 독일과 러시아의 이해관계를 옹호한 전력이 있으므로, 우크라이나의 관료들은 현재로서는 그가 키이우(Kyiv)를 방문하더라도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신념이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1970년에 바르샤바를 방문했던 빌리 브란트 총리가 자신의 조국이 저지른 과거의 전쟁 범죄들을 사과하면서 그랬던 것처럼, 굳이 그가 무릎까지 꿇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정확히 무엇 때문에 독일의 동방 정책이 그토록 오랫동안 잘못된 길을 걸어왔는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숙고를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무엇이 되었든 간에, 여전히 필요한 것은 냉철한 판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