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일화의 탄생: 단일화는 후보들 간 지지층을 합하면 경쟁 상대보다 더 많은 표를 얻을 수 있다는 계산에서 나오는 전략이다.
- 단일화는 대형 선거에서 효과를 발휘해 왔다. 직선제 도입 이후 세 차례의 선거에서 단일화가 결과를 갈랐다. 1987년 대선에서는 야권의 김영삼, 김대중 후보가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여당의 노태우 후보가 당선됐다. 1997년 대선에서는 충청 지역에 기반을 둔 김종필 후보와 연합한 야권의 김대중 후보가 여당 후보 이회창을 누르고 당선됐다. 2002년에는 여당의 노무현 후보가 제3당 후보로 독자 출마한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하면서 이회창 대세론을 눌렀다.
- 핵심은 단일화 상대의 지지층을 끌어내는 것이다. 김대중-김종필 단일화는 두 후보의 연정을 합의 조건으로 삼아 지지층의 이탈을 막았다. 후보에서 물러나는 김종필이 초대 국무총리를 맡고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기로 한 것이 주효했다. 2002년의 단일화는 노무현, 정몽준 후보가 합의한 여론 조사 방식을 거쳐 노무현을 최종 후보로 낙점하면서 정몽준을 지지했던 중도층을 끌어낼 수 있었다.
어떻게 합칠 것인가: 합리적인 과정을 통해 후보를 결정하지 않으면 물러나는 후보가 반발할 수 있고 지지층도 이탈할 수 있다.
- 당내외의 선거인단이 투표해 더 많은 표를 얻은 사람을 후보로 결정하는 경선은 대표적인 단일화 방법이다. 그러나 절차를 둘러싼 갈등이 빚어질 가능성도 있다.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은 후보는 여론 조사 도입을, 당내 세력을 확보하고 있는 후보는 당원 투표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서울시장 선거에서도 국민의힘은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의 입당 후 경선을 요구하고, 국민의당 측은 유보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 일방적으로 양보하는 경우도 있었다. 2011년 서울시장 보궐 선거에서 50퍼센트 이상의 여론 조사 지지율을 기록했던 안철수는 5퍼센트대 지지율에 그쳤던 박원순에게 후보 자리를 양보했다. 2012년 대선에서도 후보에서 물러나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를 도왔다. ‘아름다운 양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지지층의 요구를 단일화 과정에 반영하지 못한 안철수의 정치적 입지는 축소됐다.
계산으로는 마음을 얻을 수 없다: 대표적인 단일화 성공 사례로 꼽히는 김대중-김종필 연합은 정권 교체라는 시대적 사명, 일방적 양보가 아닌 조율과 합의를 통한 절차적 정당성을 모두 확보했던 드문 사례였다. 선거는 유권자의 마음을 얻어 내는 과정이다. 후보 두 사람이 결합한다고 그 후보의 지지자들이 그대로 결합되는 것은 아니다. 산술적인 합산으로 단일화에 접근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