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와 개혁을 외치다: 윌턴 그레고리 대주교는 미국의 대표적인 개혁 성향 가톨릭 성직자다. 인종 차별, 교회 내 성폭력, 동성애자 포용, 기후 문제 등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 시카고 빈민가에서 자란 그레고리 대주교는 극심한 인종 차별을 딛고 사제가 됐다. 1973년 사제 서품을 받은 뒤 2019년 미국 가톨릭교회에서 영향력이 가장 큰 워싱턴 대교구의 최초 흑인 대주교로 임명됐다. 그는 교회가 사회 현안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는 예배 건물들의 문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 먼저 교회 안에서 일어난 학대 문제 해결에 앞장섰다. 2002년 보스턴 사제 성폭력 사건 당시 그레고리 대주교는 아동 성범죄 신고를 의무화하고, 범죄를 저지른 성직자들에 대한 무관용 원칙을 담은 헌장을 만들어 통과시켰다. 가톨릭교회가 금기로 여겼던 동성애자 교인을 포용하는 데도 비교적 관대한 입장을 보였다. 가톨릭 신자들을 위한 기후 행동 계획을 수립하고, 미등록 이민자를 위한 이민제 개혁안을 의회에 요청하기도 했다.
- 조지 플로이드 사건 때는 “인종 차별 바이러스가 여전하다”며 인종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대화를 제안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반인권적 행보도 강하게 비판했다. 트럼프가 지지층을 겨냥해 교회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행사를 준비하고, 가는 길에 평화 시위를 하던 시민들에게 최루탄을 쏘자 “가톨릭 시설이 종교 원칙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오용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꼬집었다.
다양성을 품는 종교: 대대적인 인종 차별 반대 시위가 이어지고 있는 미국에서 첫 흑인 추기경 임명은 그 자체로 큰 의미를 담고 있다.
- 추기경은 가톨릭교회 안에서 교황 다음으로 높은 성직자다. 80세 미만의 추기경은 다음 교황을 뽑는 콘클라베에서 투표권을 가질 만큼 영향력이 막강하다. 이번 임명으로 전 세계 추기경 수는 232명이 된다.
- 미국 가톨릭계에는 흑인의 대표성이 부족하다. 사제 3만 7000명 중 흑인은 250명뿐이다. 흑인 사제들은 힘 있는 직책을 받을 수 없었다. 가톨릭계에도 인종 차별이 여전한 만큼 최초의 흑인 추기경인 그레고리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 종교는 정치와 분리돼 있지만 실제로 정치에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미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법으로 꼽히는 민권법이 대표적인 예다. 인종과 종교, 성별 등에 근거해 고용주가 직원을 차별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으로, 마틴 루터킹 목사의 비폭력 흑인 민권 운동에서 시작됐다. 이번 임명도 종교계를 넘어 미국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를 끌어내는 또 하나의 출발점이 될 것이란 관측이다.
서로 다른 변화의 바람: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21일 동성애자들에 대한 법적 보호를
지지했다. 지난 1월에는 사상 처음으로 교황청 국무원 차관에 여성을
임명했다. 미국 종교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으로부터 시작된 진보의 바람이 불지만, 법조계는 보수적으로 바뀌고 있다. 보수 성향의 에이미 코니 배럿 연방대법관 지명자의 인준안이 26일 상원을
통과했다. 연방대법관의 이념적 지형은 보수 6명, 진보 3명의 보수 절대 우위로 재편됐다. 종교와 법은 사회의 이념과 가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두 갈래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걸음이 미국 사회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